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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랑하다(3)

스물여섯, 정이나 씨

by 도란도란


우현이의 엄마를 만나고 온 그날 밤, 우현이가 앞으로 찾아왔다. 퉁퉁 부운 두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또 울었구나. 너는 그리 눈물이 많아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니?’


괜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우현이는 사거리에 있는 6층 빌딩의 건물주, 그가 평생 시를 쓴다고 해도 그의 건물과 어머니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나 같은 애들이 들러붙어도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떼어내면서 말이다. 어쩐지 부러웠다. 나는 평생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

우현이가 주춤하더니 말했다.


“미안해. 우리 엄마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어. 바로 달려오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네가 한 말은 아니잖아. 너희 어머니는 내가 너한테 들러붙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 걱정 마시라고 했어. 우린 친구잖아. 서로 들러붙고 그럴 일 없으니까.”

“들러붙었다는 말을 했어?”

우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우현아, 내 앞에서 그만 울어. 난 지금 너 아니라도 울 일 많아. 그리고 앞으로는 아빠랑 많은 시간을 보낼 거야. 한동안은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응. 안 울어. 네가 힘들 때 옆에 있고 싶어. 만나자고 안 할게. 네가 연락하고 싶을 때 해.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어. 늦었다. 조심히 가.”


우현이 어머니가 용돈 하라고 건네준 500만 원은 돌려주지 못했다. 우현이가 봉투를 받으면 속상해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들었다.


우현이는 슬픔을 느끼는 데 있어서 벼린 감각을 타고났다. 세상에 슬퍼할 것이 널리고 널린 아이였다. 우연히 자신의 발에 밟혀 죽은 개미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한동안 울적해 보였다. 죽은 개미를 떠올리며 시를 창작하고 내게 낭송해 주기까지 했다. 나는 우현이의 시 낭송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진심으로 그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세상살이가 참 여러모로 힘들겠다 싶었다.


우현이에게 타인의 마음이라고 예외일까. 내가 아빠와 이별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슬픔을, 우현이가 느끼길 바라지 않는다. 가 나보다 더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기도 했다.


들러붙지 말자.



아빠는 6개월 분의 수강료를 선납했다. 150분씩 주 3회에 개인 교습이고 수강료는 월 45만 원이다.

270만 원이 이체된 다음 날, 아빠는 화실로 왔다. 나는 아빠를 보곤 무덤덤하게 물었다.


“6개월 남은 거야?”


“응. 좀 짧지?”


“짧다 생각하면 짧고, 길다 생각하면 길지.”


“우리 이나, 철학자 같구나.”


“아빠, 1년 치 선납은 어때?”


아빠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이내 반달눈이 되었다.


“이나야, 난 네 걱정이 하나도 안 된다. 이렇게 영업하는구나. 궁금해서 그러는데 1년 치 선납하는 수강생도 있니?”


“없어. 아직까진. 아빠가 최초가 되어 줘. 그럼 두 번째도 나타나지 않을까?”


아빠가 허허 웃더니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고, 잠시 후 내 휴대폰의 알람이 울렸다. 270만 원이 이체되었다. 나는 알람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몇 달은 월세 걱정이 굳었다.


“호구가 된 느낌이 드는구나. 딸에겐 호구가 되어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아빠에게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하고 말했다.


수강료를 1년 치나 선납해 주신 최초의 수강생분께 특별히 1개월 무료 수강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수강 기간은 총 13개월입니다. 내년 4월까지 주 3회, 빠지지 말고 꼭 나오세요.”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걸었다. 아빠가 호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무료 혜택까지 모두 받아야 한다. 13개월 후, 내년 4월에 아빠에게 수강료를 또 받고 싶다.


“1년 치 선납, 두 번째도 아빠였으면 좋겠어.”


마음속으로 되뇌던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말했다.


“그러자.”


아빠는 성실하고 재능까지 있는 수강생이었다. 한 번만 설명해도 그대로 똑같이 따라 그릴 정도였고 집중력까지 매우 좋아서 진도가 쭉쭉 나갔다. 아빠의 집중할 때 모습을 보고 있으니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


아빠가 그린 인물 소묘가 화실을 채웠고,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아빠가 호구가 안 될 것 같은 희망에 부푼 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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