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셋, 정이만 씨
당연히 함께 나이 들어갈 줄 알았다. 사진 속의 아내는 그대로 멈춰 더 이상 늙지 않았고, 나는 사진 밖의 세상에 남아 늙어 갔다. 아내가 떠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잘 드러나지 않다가 어느 한순간에 봇물이 터지듯 흘러넘치는 슬픔이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선 다신 그녀를 볼 수 없단 상실감에 남은 삶이 허망했다.
아내가 떠나고 두 달 남짓 지나서였다. 아내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기로 했다. 현관의 신발장을 열고 아내의 신발을 꺼내다가 스르르 다리에 힘이 풀렸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뒷굽이 반쯤 닳은 아내의 검은색 단화를 보고 울컥했다. 몸을 웅크렸고 고개를 떨군 채 입을 막았다. 끄윽끄윽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때 내 등을 토닥이는 작은 손길이 느껴졌다. 이나였다. 이나가 내 뒤에서 등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 토닥임이 '괜찮다, 괜찮다' 말해주는 듯했다. 이나의 자그마한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내 마음에 금세 번져나갔다. 그날의 온기가 나를 살렸고 살아가게 했다.
일주일에 세 번 이나의 화실에 연필 소묘를 배우러 갔다. 사람 얼굴을 그리고 싶다는 내게 이나는 연필 소묘를 추천했다. 재료도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되고 미술의 기본기를 익히기에 가장 좋다고 했다. 이나는 또다시 나를 살아가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수강료를 1년 치나 선불로 받고는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꼭 1년을 다 채우라 신신당부했다. 게다가 특별 서비스라며 1개월을 더 추가해 줬다. 마치 더 살아 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나는 내 그림을 보며 칭찬을 쏟아냈다. 평소 차분하던 이나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 말들이 나를 살아가게 했고 더 살고 싶었다.
“이~야~ 이 그림 구도 잡기가 까다로운데 아빤 어쩜 이리 완벽하게 잡았어! 이러면 내가 가르칠 게 없잖아. 수강료를 환불해 줘야 할 정도야.”
“내가 누굴 닮아 그림에 재능이 있나 했더니 아빠였어.”
“아빠, 겨울 전시회에 낼 작품이 너무 많은데. 하나같이 훌륭해. 뭘 내지? 이참에 개인 전시회라도 여는 건 어때? 추운 겨울 말고 더 그려서 내년 봄에 말이야.”
낙원동 주민센터 문화 교실은 매년 12월이 되면 수강생들의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1층 민원실 앞 넓은 로비에 공간을 따로 마련해서 한 달간 전시실을 운영했다. 이나의 어반스케치 반도 수강생 작품을 내야 했다. 이나는 한 사람당 두 작품까지 낼 수 있다며 여름 분기를 시작하며 미리 공지했다.
박봉수 씨와 김순임 씨는 여름 분기를 마치고 늦여름에 캐나다로 떠났다. 그곳에 사는 딸이 출산해서 몸조리를 도와주러 다녀오겠다 했다. 장하리 씨와 양혜은 학생은 가을 분기에도 등록했고 전시회 준비를 시작했다. 전시회를 앞두고 둘은 이나의 화실에 와서 그림을 그렸다. 둘은 지난봄에 단풍잎을 보고 닭발을 그려놓고는 자신들은 그림 쪽은 아닌 것 같다며 실망했었다. 그러나 장하리 씨와 양혜은 학생은 수업 한 번을 빠지지 않았고 매우 성실했다. 집에 돌아가 그날 배운 것은 반드시 복습까지 하면서 실력이 대폭 늘었다. 지금은 그럴듯한 풍경화를 그려 냈다.
시간은 무섭도록 빠르게 흘러갔다. 역대급 더위라며 연일 최고 기온을 오르내리던 여름도 훌쩍 지나갔다. 예상했던 6개월을 넘겼다. 길어야 6개월이라던 말을 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머나먼 날처럼 느껴졌다. 더 오래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품었으나 통증이 몰려올 때면 곧 숨이 끊어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오직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간만이 내가 아픈 사람이란 걸 잊게 했다. 그림 그리길 잘했다 싶다.
10월 중순에는 이나와 소백산 연화봉에 올랐다.
이제 막 나뭇잎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하고 싶었던 일은 소백산에서 단풍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했다. 이나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림도 배웠다. 이렇게 단풍까지 보게 되니 더는 여한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나는 나와 달리 하고 싶은 것이 하나둘 늘었다.
“아빠, 내년 봄에는 철쭉제 보러 오자.”
매년 봄마다 이곳 연화봉 일대에서는 철쭉제가 열린다. 산 능선을 타고 흐드러지게 핀 철쭉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나는 다음 봄을 약속할 수 없었다. 그때까진 내 몸이 버티지 못할 거란걸 안다. 진통제가 듣지 않는 극심한 통증의 빈도가 점점 늘어 갔다. 곧 그림도 그리기 어려울 것이다. 손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 여러 번 연필을 떨어뜨렸다. 조만간 연필을 잡을 힘조차 없어질 거다.
내가 선뜻 대답을 못하자 이나가 다시 말했다.
“내년 봄에 여기 앉아서 아빠랑 그림 그리면 좋겠다. 그치?”
나는 여전히 답을 할 수 없었고 이나가 짧은 호흡을 내뱉고는 밝게 말했다.
“근데 꼭 내년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아빠, 내가 뭘 챙겨 왔게? 짜잔~”
이나가 가방에서 돌돌 말아온 종이를 꺼냈다. 필통에서 연필 두 자루도 꺼내 내게 한 자루를 건넸다.
“수강생 님, 오늘은 야외 수업입니다. 이곳 풍경을 어반스케치로 남겨 보죠.”
이나가 먼저 빠른 손놀림으로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능선의 모습이 드러났고 제2 연화봉의 대피소도 보였다. 나는 연화봉에서 비로봉 쪽 능선을 바라보았다. 연화선경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물들기 시작하는 능선과 파란 하늘이 볼수록 눈이 부셨다. 연필을 잡고 풍경을 종이에 옮겼다. 그 속에 그림을 그리는 이나의 모습도 그려 넣었다. 매년 소백산에 올라 풍경을 보고 감탄했는데, 오늘 보니 풍경 속의 이나가 더 아름다웠다. 사람이 풍경보다 더 아름답다.
“이나야, 고맙다.”
이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응? 뜬금없이? 뭐가?”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줘서. 오늘 산에 함께 와줘서. 아빠가 지금까지 살 수 있게 해 줘서.”
“뭐야~ 우리 아빠 맞나? 이런 낯 간지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고.”
미소 짓는 이나의 모습이 가을 하늘보다 더 창연히 빛났다.
“나도 고마워. 아빠. 이렇게 그림 잘 그리는 재능을 물려줘서. 오늘 함께 그림 그려 줘서. 나 잘 키워 줘서. 그렇지만 난 더 자라야 해. 마음이 덜 자랐어. 요만큼만 더. 그러니까 더 봐줘.”
능선 너머의 먼 하늘을 보며 바랐다. 이나가 무탈하기를. 그 어디에 있던 너의 무탈을 나는 늘 바랄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자 허기와 피로감이 일시에 몰려왔다. 등산로 초입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이나와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마주 보고 앉아 밥을 쓱쓱 비비고 매콤한 고추장 맛에 씩씩 거리며 먹었다. 얼마나 매콤하던지 코끝이 찡하고 눈은 매웠다. 속이 아렸다. 물을 연거푸 벌컥벌컥 마셔댔다.
“아빠, 많이 피곤해 보여. 차에서 푹 자. 내가 안전 운전할게.”
“그래, 고맙다.”
“오늘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네.”
“다 고맙구나. 좋은 날이었어.”
나는 이나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곯아떨어졌다. 아주 달게 든 잠이었다. 더 이상의 기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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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다음 이야기는 아내를 만나 도란도란 나눌 것이다. 꼭 한마디를 세상에 남길 수 있다면 이 말이 떠오른다. 역시나 이 말밖에 없다.
고맙습니다.
<예순셋, 정이만 씨>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