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정이나 씨
이별은 홀연히 찾아왔다. 아빠의 마지막은 곤히 잠든 모습이었다. 아빠의 영혼이 언제 몸을 떠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깨우면 곧 일어날 것만 같았다. 아빠를 불렀다.
“아빠.”
나는 운전 중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아빠를 연거푸 불렀다. 흔들어 깨웠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순간 아빠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아빠!”
고속도로의 갓길에 차를 세웠다.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휴대폰을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할까. 한 사람만 떠올랐다.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가 물었다.
“어디야?”
우현이의 목소리를 듣자 참았던 눈물이 미끄러져 나왔다.
“내가 갈게. 어디 있어?”
우현이를 기다리며 어딘가를 향해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았다. 무수히 번져 나가는 전조등 불빛에 눈이 부셨다. 이곳에서 나만 목적지를 잃은 듯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우현은 장례식 내내 함께 했고 끝까지 울지 않았다.
아빠의 시한부 소식에 나보다 더 대성통곡을 하던 지난날의 그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표정에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내 옆에 서서 내내 무덤덤한 우현이의 얼굴이 낯설기만 했다.
장례식 첫날에 우현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장례식장을 나서며 내 손에 팥양갱 하나를 건네주었다. 손이 따뜻해서 흠칫했다. 지난번의 무례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던 사람도 손은 따뜻했다.
우현의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야 버틸 수 있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염려를 읽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와 이별했다. 이별은 홀연히 찾아왔으나 나는 오래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안의 사랑이 슬픔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사랑이 슬픔을 이긴다. 언제나 말이다.
지난봄 이후로 우현을 만나지 않았다. 간간이 연락은 주고받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고 싶진 않았다. 나의 불안한 감정을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우현이에게는 더욱이 싫었다. 그간 우현은 종종 우리 집 앞과 화실 근처를 서성이다 돌아가곤 했단다. 그러다 아빠와 마주치곤 했다.
“네 모습은 한 번도 못 봤는데 아버님은 몇 번이나 마주쳤어, 집 앞에서, 화실 앞에서. 나를 보면 밥이나 차를 꼭 사주셨어. 네 이야기도 전해 주셨고.”
우현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네 생각이 날 때마다 쓴 편지도 있고, 이것저것 꽤 끄적였어. 아버님이랑 나눈 대화도 있어. 자, 선물이야.”
집에 돌아와 상자 안에서 편지와 메모지를 꺼내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우현의 시와 편지를 6년이나 받아왔다. 나는 그의 감성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섬세한 감정의 결을 다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편지에 담긴 그의 마음이 조금씩 전해져 온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써 내려갔을지 떠올려 보았다. 타인의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을까. 마음은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내 마음의 눈이 반짝 뜨였다.
연분홍색 포스트잇에 적힌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와 우현이 나눈 대화의 일부였다.
아버님의 부탁은 단 한 가지.
이나가 문득 연락하거든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기.
약속했다. 어디든 달려가겠다고.
아빠는 자신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었다. 그 순간이 오면 달려가 줄 이가 내게 있기를 바랐을 거다. 우현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삶에서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우현이가 내게 보낸 편지와 시를 모두 꺼내 보았다. 나는 몇 번의 답을 했을까 떠올려 보니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현이를 생각하며 편지를 써 내려갔다. 한 편에는 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사진을 보지 않아도 그릴 수 있다.
너는 내 마음에 별이 돋게 하는 사람이야.
마음이 억실억실 잘생긴 사람이기도 하지.
왈칵왈칵 눈가가 뜨거워지는 너를 보며
만져지지 않는 슬픔을 눈으로 그려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진작 알았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많아 시를 쓰는 너를,
나는 스무 살부터 쭉 사랑했어.
길지 않은 내 편지를 우현이는 읽고 또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도장이라도 찍듯 꾹꾹.
“이나야, 넌 시인이야. 나보다 네가 시를 써야 해.”
“그럴까? 내가 너의 등단을 늦추는 게 될 거야. 괜찮겠니?”
“눈가가 홧홧해. 나 이제 왈칵 쏟아내도 되지?”
“그럼. 네가 울 차례야. 맘껏 울어.”
사랑은 떠나고 떠나도 또 남는다. 퍼내고 퍼내도 다시 차오를 것이다.
<스물여섯, 정이나 씨> 이야기 끝
이번 화를 끝으로 <못 먹어도 GO!> 연재를 마칩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한 후에
또 다른 '글'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