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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쓰는 사람 09화

삶에 머무르다, 가다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크리스티나 벨레모 #단추

by 수키
나는 내 삶에서 머뭇거릴 것인가, 머무를 것인가


나는 ‘어떤 사람’ 되고 싶은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아이를 키우면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이 흐릿해지고 있다고 느껴졌을 때부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아이는 아이대로 성장하고 있고, 남편도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내 시계만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삶 전체를 잠식해 버린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라면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씩이라도 변화해 나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제나 제자리걸음 같은 육아라는 일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뭐라도 해야 나는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질 것 같았다. 육아를 하면서 참 여러 가지를 배웠다. 온라인으로 대학에 다니고, 글쓰기와 토론, 역사 보드게임도 배웠다. 배우는 만큼 그것을 증명해 주는 자격증들이 늘어났고,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내 하루를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에 만족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배우면서 제법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했다. 3년의 세월 동안 배우는 것에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점차 배우는 것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책장 어딘가에 잠들고 있는 자격증들은 나를 잠시 과거의 추억에 잠기게 할 뿐 지금의 나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로 남아있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때면 물음표로 남는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매진했던 순간에는 자아도취에 빠진 듯 새로운 것에 시도하는 자신의 모습에 뿌듯했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것만 있으면 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시댁에서 저녁을 먹던 날, 아이를 키우느냐 고생이 많다며 나에 대한 걱정을 하시던 시어머니가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 말에 남편은 “그냥 집에 있지.”라고 짧게 대답했다. 나는 그냥 집에 있지 않았다. 집에서 육아를 하며 프리랜서로 새벽까지 일하느냐 몸도 마음도 무척 고단한 상태였는데 내 근황에 대해 대충 얼버무리는 무심한 남편의 대답에 서글펐던 기억이 있다. 여전히 남편은 여러 자리에서 나에 대해 ‘그냥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나는 옆에서 그 말에 동조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내 존재에 대해 동조하듯이. 그리고 그 동조는 인정이 되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인사할 때도 스스로를 ‘그냥 있는 사람’으로 망설이며 이야기한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학생이라는 신분이, 회사의 명함이 늘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해주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사회에서 내 위치가 바뀔 때마다 나의 상태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들과 같이 있다는 안정감에 그것이 곧 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곳에서 한 발 벗어나자 나를 설명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의 위치는 내 위치가 아니라는 듯 부정하면서 그것이 내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불안을 쫓기 위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갈망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의 어중간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던 내 위치가 불만이었다. 그래서 육아를 하는 동안 그 위치에 대한 불안감이 깨어났고, 두리뭉실한 내 삶을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억지로 채워 넣게 했다. 어쩌면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나의 의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나는 무엇을 선택하여 앞으로의 내 삶을 꾸려나가야 할까?’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태도는 다시 불안감을 키울 뿐이었다. 한창 토론을 배우러 다니던 때에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게 되었는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으로 소개를 하라는 말에 나는 “자유를 꿈꾸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꽤 진지했지만 내 소개를 듣던 다른 사람들은 웃으면서 “지금은 자유롭지 않은 거에요?”라고 되물었다. 내가 자유를 꿈꾸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여도 충분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 위한 주문과도 같다. 나는 내 삶에서 머뭇거릴 것인가, 머무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살아가는 매 순간 내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각 경험은 역사의 일부라는 존 듀이의 말처럼 아무 일도 없이 보낸 하루라도 그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에 중심을 두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사십 대가 되어 깨달았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의 모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다 가는 과정이다. 그런 나의 순간들을 어떻게 선택하며 살아갈지 책과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배우고 있다. 그리고 현실을 마주하며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자고 다짐한다. 가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해 본다. 죽기 전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아이의 오래된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떠오르는 답은 없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 삶에 머물다가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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