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돌이쿵! #존클라센 #시공주니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까?
시시때때로 언니의 전화가 걸려 온다. 한창 책에 재미를 붙인 언니는 자신이 읽은 책이 재미있을 때도, 없을 때도 나에게 전화를 해서 책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쏟아 낸다. 그날도 독서 모임을 한창 하고 있는데 언니의 전화가 걸려 왔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전화하니 짧은 한숨과 함께 “아빠는 왜 그럴까?”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언니는 아빠와 같이 일한다. 언니가 사장이고, 아빠가 직원이다. 언니는 아빠가 고집이 세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며 같이 일하는 것에 대한 고충을 자주 털어 놓았다. 어릴 때 아빠는 나에게 어렵기만 한, 먼 존재였지만 장녀였던 언니는 아빠와 긴밀했고, 아빠도 그런 언니를 의지했다. 아빠는 언니가 사업을 하다가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어 할 때마다 자신이 도와줄 테니 이왕 하는 거 끝까지 해보라고 격려했다. 하지만 그 격려는 일관성이 없었다. 아빠는 언니에게 서운할 때면 원망의 말을 뱉어냈다. 둘은 애증의 관계를 오랫동안 이어가고 있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한껏 쏟아낸 전화 통화가 마무리될 때쯤에 언니는 나에게 “너는, 얘기를 해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랑 어떻게 해?”라고 물었고 나는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냥 무시하지.”
느낌이 좋아서 그냥 그곳에 서 있던 거북이. 느낌이 안 좋아서 그냥 다른 곳에 간 아로마딜로. 둘의 시작은 같은 마음이다. 그냥, 느낌, 좋아서. 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공교롭게도 거북이가 있는 자리에만 돌이 떨어진다. 연속되는 우연의 힘은 굉장하다. 우리는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고 그 과정에서 이어지는 우연의 연속을 통해 자신만의 근거를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가는 데 사용한다. 아로마딜로처럼 계속 안 좋은 것들을 피해 가면 좋겠지만 우리가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때그때의 삶의 사건을 바탕으로 자기 생각을 검토하고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남편과 부부싸움을 한 어느 날, 그는 우리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나에게 물었고, 나는 우리의 관계에 생긴 골은 너무 깊어서 그것이 가능할까를 묻자, “나는 굉장히 단순한 사람이야.”라며 방법을 제시하면 그것을 따르겠다고 했다. 정말 그게 가능할까? 그동안의 생긴 복잡한 문제가 내가 제시만 하면 해결이 가능하다고? 허망했다. 남편과 갈등이 생길 때면 각자의 궤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의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개선하자니. 남편은 가족 중에 제일 개선이 안 되는 사람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서로 잘 맞지 않더라도 대화하게 되면 그 사람과 맞추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대화가 되지 않을 때는 그러한 기대가 사라지니 자연스레 포기하게 된다. 언니에게는 아빠가, 나에게는 남편이 물리적으로 가장 가깝지만, 정서적으로 가장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든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남편과 그 명확성을 싫어하는 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연애 시절 무엇이든 결정을 잘하고 계획하는 남편이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사는 동안 우리가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남편의 장벽은 높고 튼튼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반면 나의 장벽은 낮고 유동적이다. 하나의 확신을 갖고 결정하기보다는 상황에 맞춰서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그래서 완벽한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에 마음이 간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편하게 그들의 선택을 따르면서 그것이 결국은 옳은 것이었다고 내 자신을 속이곤 했지만, 점점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순간 한꺼번에 터진 그 말들은 감정과 뒤엉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웠다.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다. 내 생각을 전달하는 위해서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형식의 말이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 글은 여러 번 쓰고, 고칠 수 있지만 한번 뱉은 말은 돌이키기 어렵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나를 판단하는 잣대의 근거로 축적된다. 같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데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공을 세게 날리는 경우처럼. 이런 경우 높이 허공을 날아가던 공은 십중팔구 라인 밖으로 떨어진다. “내가 공을 보냈는데 받지 못한 네가 잘못인 거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대화에서도 일어난다. “나는 그렇게 말을 안 했는데, 그렇게 받아들인 네가 이상한 거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렇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한편 그 믿음은 어떤 형태로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 본다. 발가벗겨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의 장벽은 높이 세울수록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믿음은 삶의 반경을 더욱 좁게 할 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나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잎을 버리는 나무에 봄이 되면 새잎이 돋아나듯,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야말로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여지를 둔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텅 빈 곳이 아니라 누군가가 와서 새로운 씨앗을 뿌릴 수 있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더 무르익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