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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쓰는 사람 07화

무조(無調)

#다리 #에바린드스트룀 #단추

by 수키
늑대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친구들과 난생처음 단풍 구경을 갔다. 전시도 보고, 여유롭게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와 만날 때에는 깊은 관계가 주는 편안함이 있다. 나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하지 않아도, 굳이 에둘러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무방비 상태의 편안함.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노력하지 않는 이 관계가 좋다.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아이를 키울 무렵이었다. 어떠한 연결점도 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거리감을 좁힐 방법은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운다는 공통점을 내세워야 했고 무엇을 하든 함께 해야 했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되면 약속하지 않아도 놀이터에서 놀았지만 내 아이는 혼자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아이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함께 놀다가 갈등이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음 편하게 혼자 노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그렇게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면 내 마음도 같이 평온해진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경계하느라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생각이 자유롭게 부유할 때야말로 나를 충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이를 핑계로 내가 혼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린이집을 졸업할 무렵 내 아이를 제외한 모든 아이가 놀이터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그들만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와 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엄마는 종종 나에게 외롭게 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까지 외롭게 만든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은 어쩌면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자세인데 나는 그것을 거스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걸까?


어릴 적 생활통지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의 학교생활 태도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여러 번 같은 어른을 만날 때면 멀리서부터 어떻게 또 그곳을 지나가야 할지 고민이었다. 세 번째 같은 인사를 했을 때 동네 어른은 나에게 매번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냥 지나가라고 했다. 일곱 살 무렵의 기억인 것 같은데 나는 마흔 살이 넘어서도 여전히 동네에서 마주치는―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나는 늑대일까? 돼지일까? 에바 린드스트룀의 《다리》를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늑대들은 왜 돼지를 초대했고, 돼지는 기꺼이 그들의 초대에 응했을까. 앞뒤 맥락이 없는 대화 속에서 그들은 마주 보며 차를 마시고 있다. 나는 늑대의 집으로 아무 의심 없이 들어가는 돼지의 순진함이 내심 부러웠다.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늑대는 어쩌면 다리가 없는데 원했던 것은 아닐까? 시골에 살다가 친구가 그리웠던 늑대는 그렇게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어쩌면 늑대처럼 굉장히 서툴고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고 있는 건 아닐까. 첫인상을 보고 아무 근거도 없이 나와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만, 그 과정이 서툴다. 서툰 과정은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결국은 온전하게 이어주지 못한다.


본 방송 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짝을 찾는 프로그램인데 정해진 공간과 시간 내에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억지스럽기도 하고 순수해 보이기도 하며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첫 만남이다. 그때의 분위기는 TV를 보고 있는 사람마저도 간질거리게 하지만 그 첫 고개를 넘지 못하면 그다음 고개를 넘을 수 없다. 그들의 대화는 듣다 보면 그 말에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을지 궁금한 한편 애초에 진실이란 만들기 나름 아니겠냐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TV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는 나는 참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 고민이 앞서는 나는 매사에 서툰 편인데 남편은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남편과 같은 성격의 사람은 ‘사회성이 좋다’라고 평가되고, 나와 같은 사람은 ‘사회성이 없다’라고 평가된다. 전자는 좋은 것, 후자는 그렇지 못한 것이 된다. 사회성을 기르려면 사회적 규칙에 맞는 행동과 언어를 배워서 그것을 시의적절하게 사용하고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원만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사회성이 좋다’라는 것에 대해 마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사회성’은 마치 ‘개성’과 반의어처럼 생각되고 ‘나’를 드러내어선 안 될 것 같은 암묵적인 강요가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그림책의 늑대에게 더 마음이 간다. 그가 안쓰럽고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늑대들은 왜 시골에 와서 살게 되었을까? 늑대들은 돼지를 집에 초대하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서투르다. 반면에 돼지는 그들의 호의에 순진하다고 생각할 만큼 무방비한 상태로 받아들인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늑대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하는 쪽은 오히려 내 쪽이다. 하지만 돼지가 다시 집을 나설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복구 중이라는 다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 마치 이것은 늑대의 마음과도 같다.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 없는 마음을 억지로 연결해 보려고 하지만 뜻대로 잘되지 않아 겉으로만 맴돈다. 늑대도 나도 어쩌면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속에서 헤매다가 어떨 때는 없는 다리를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악기를 연주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제 음을 찾아 하나하나 소리를 내어 조율하는 것이다. 문득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여러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세상에 나를 조율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늘 세상의 화음에 맞추어 소리를 낼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불협화음정이 필요할 때도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긴장을 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듬지 않은 소리가 난다. 친구들은 그런 나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준다. 그리고는 “그래야 너지.”라고 무심하게 툭 던진다. 나는 그 한마디에 서운함보다는 다정함을 느낀다. 억지로 화음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 이 관계를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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