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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쓰는 사람 03화

바라고 보다가 보게 되는 것들

#고래가보고싶거든 #줄리폴리아노 #에린E.스테드 #문학동네

by 수키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만 들리는 대답


매주 화요일마다 있는 어린이도서연구회의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모임 구성원 중 한 분과 시작된 이야기가 길어져 도서관 출입구에서 발이 멈추었다. 나는 그날 몸이 좋지 않았고 이미 밥을 먹고 가자던 다른 분의 제의를 거절한 터라 마음은 얼른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분의 한마디가 내 발목을 잡았다.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거예요?” 내가 하는 독서 모임에 대해 주변에 크게 알리지 않는 편이지만 책이 좋아서 만난 사람들과는 내가 어떤 모임들을 하고 있는지 터놓은 상태라 당시에 세 개의 책 모임을 하고 있는 내가 언제 책을 읽고, 어떻게 책 읽을 시간이 나는지 이것저것 궁금해하시다가 나의 목표를 물어보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전 확실한 목표는 없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도 없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게 책이니까 열심히 책만 보고 있어요.”


새롭게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최근에 공부방을 열었다는 그 분은 생각보다 주변에서 반응이 없어서 놀랐다는 상황과 함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는 회사 정보에 대해 나에게 알려주었다. 내가 워낙 책을 좋아하니 그쪽 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정보를 얻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다. 보통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무언가를 이루어내야 하는 목표가 생기기 마련인데 나는 요즘 그런 의지가 사라진 상태다. 그렇다고 가라앉아 있을 수만은 없으니 평소 하던 루틴들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보내고 있다. 아이와 뉴스를 보던 어느 날 저녁, TV에서는 2030세대의 ‘쉬었음’ 인구가 70만 명을 넘어서는 사회의 현실을 우려하면서 거리로 나가 그들을 인터뷰했다. 한 인터뷰이는 상황만 허락된다면 계속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 밤 아이는 나에게 “나도 크면 그냥 쉴래.”라고 말했고, 왜 쉬고 싶냐고 물으니,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집안일을 같이할 때면 아이는 자기에게 노동을 시킨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노동은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몫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그럴 때면 나는 아이에게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의 경계를 구분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 그 경계를 콕 집어 강요하지 않았지만, 학교에 가기 시작했을 무렵부터는 의식적으로 알려주기 시작했다. 하루는 친구랑도 놀고 싶고, 레고도 만들고 싶고, 뉴스도 보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숙제를 언제 할 건지 물어보자 이따가 하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한 아이는 그제야 밤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조급해진 마음에 울음을 터뜨렸다. 겨우겨우 숙제를 마치고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아직 다 못 놀았다는 것에 아쉬워했다. 나는 아이에게 하고 싶은 게 많지만 다 할 수 없다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정하고 하지 못한 것에는 아쉬워하지 말라고 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을 때 고민을 들어주던 친구가 같이 밥을 먹던 테이블 위에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나에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말해보라고 했다. 친구는 나의 대답을 차례차례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완성된 목록들을 보여주며 이 중에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의 순위를 정해보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떠났다. 친구가 알려주던 그것.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른 하고 싶은 것들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부끄럽게도 그날 처음 알았고, 지금도 여러 가지를 두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날 그 친구의 얼굴과 나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떠오른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 의지가 있으면 본인이 깨닫고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철학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나이에 내가 그런 깊은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학창 시절 나는 시험 보기 일주일 전에 벼락치기로 공부했고, 친구들이 많이 다니는 학원에 다니고, 대학을 선택할 때도 고민 없이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될놈될(될 놈은 된다)’이라는 말이 있지만 되기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기회도 저절로 오고, 꿈도 저절로 생기고, 직업도 어른이 되면 저절로 하게 된 일이 직업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적당한 선 안에서 살아왔다.


그림책 《고래가 보고 싶거든》을 읽으면서 해야 하는 것, 다 하고 싶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제일 하고 싶은 그것이 나는 고래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만 딴짓의 달콤함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딴짓을 하다 가도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그림책을 읽고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나는 망설였고 대답 대신 아이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아이는 집을 짓고 싶은데 정말 자신이 그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직 아홉 살인 아이다운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잠들고 곰곰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그중에 정말 꼭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부족하다. 시간이 없을 것 같고,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 같고, 현실 불가능할 것 같은 몽상들. 나도 잘 모르겠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지.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내가 원했던 모습과 달랐을 때의 실망들. 달랐더라도 그 안에서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더라면, 그랬다면 내가 원하는 모습과 점점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의 저자 최혜진이 권윤덕 작가에게 장애물을 창작의 재료로 삼은 경험에 대해 질문했을 때 그는 “첫 그림책을 어떻게든 완성해서 내 밥그릇을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으니까요. ‘내가 이것을 정말로 원한다’는 실감을 가지게 되면 장애물, 난관, 제약 조건을 수긍하고 적응해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해볼 수는 없을지 탐색하게 돼요.”라고 말했다. 이상과 현실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서 맞춰진 모습. 나는 그것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짠!’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의 글을 완성할 때도 여러 번의 퇴고를 거치며 내 생각을 잘 담아낼 수 있는 단어를 고르고 골라 깎아서 다듬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도 이것과 닮았다. 시간을 들여 자신의 힘으로 다듬어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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