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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 때, 첫 만남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먼저 “안녕”하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냐고 물으니, 자신의 특징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 나의 특징. 나라는 사람의 특징을,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이 빼고, 출신 빼고, 소속 빼고 나라는 사람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반대로 이런 배경이 없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하나의 ‘나’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이런 내 존재의 위태로움은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번 느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자면 시어머니로부터 내 이름이 아닌 아이의 이름으로 불리던 날인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아”라고 부르던 순간,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심란함을 느낌과 동시에 가족들 사이에 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져 버린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꼈다. 자존감이 높아서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내야만 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타인에 의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던 그날의 당혹스러움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연말이 되면 남편은 늘 바쁘다. 초등학교 동창부터 시작해서 첫 직장 그리고 지금의 직장까지 모든 곳에서 남편을 부른다. 그에 비해 나의 연말은 다소 조용하다. 내가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일상을 보내다 문득 이런 날들을 마주할 때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로운 감정이 나를 엄습할 때면 의식을 치르듯 고향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 오래된 친구를 만난다. 그러면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을 수 있다. 이 외로움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왜 나는 외로움을 느끼는 걸까? 그들이 그리워지고 그들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알기 때문에 내 외로움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며 질문의 답을 찾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나의 감정은 조금만 틈이 생기면 불쑥 튀어나와 나를 흔든다.
학교에 다니고, 회사에 취직하고,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당연하게 부여되던 나의 위치가 육아를 시작하면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달은 태양이 없으면 밤하늘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달이 우주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사회에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누군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데 흐르는 세월 속에서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관계에 나를 묶어 두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를 만나고, 떠나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시 헤어지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관계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들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하면서 지낼 수 있어?”라고 물었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냥 만나는 거지 뭐.”라는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남편에게 쉬운 그것이 나는 참 어렵다.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던 그것은 어쩌면 내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던 것은 아닐까? 사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곳은 아이 옆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자기 반에 존재감이 없는 친구가 있다고 했다. 가만히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조용한 성격의 그 아이는 눈에 띄지 않는 단다. 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냐고 물으니, 소리를 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는 큰 소리로 말하고, 일부러 발도 쿵쿵 구른다고 한다.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어릴 적의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도 사춘기가 왔고 언니와 달리 나를 신경 써주지 않는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서러워 엉엉 운 적이 있다.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니 그제야 가족들이 왜 그러느냐고 나를 봐주었다. 그 일은 내 인생에서 첫 반항이었다. 지금도 아이를 키우면서 서운함을 꾹꾹 눌러 담다가 그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터뜨리곤 한다. 하지만 참았던 감정들이 뒤엉켜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는 감정에 서투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조용히 살아왔던 내가 자신을 가두어 두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혼자였던 시간에서 나오기로 했다. 지금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목소리를 낸다. 크게 웃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도 한다.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가 먼저 가볍게 “안녕!”이라고 말해야 시작할 수 있다. 그다음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