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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싶은 조각은 무엇일까?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텅빈이가 있었다. 불편한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눈치를 보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텅빈이. 그런 텅빈이는 자신과는 다른 꽉찬이가 신기했다. 남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는 자신 있어 보였지만 정말 나만의 생각만으로 살아간다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텅빈이는 자신이 삶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꽉찬이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연습을 하면서 점점 꽉찬이가 되어 갔다. 하지만 만족감보다는 그렇게 변하는 자신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본래 텅빈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꽉찬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텅빈이는 자신에게 채웠던 꽉찬이의 것들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다시 비어 버린 텅빈이의 마음에는 무엇을 채워 넣으면 좋을까.
지극히 내향적인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도 즐긴다.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서로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텅 비어 있던 마음은 어느새 다양한 감정으로 차오른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가장 막막했던 부분은 나에게 일어난 여러 사건을 하나의 사실이 아닌 그 당시의 감정과 느낌으로 되짚어보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시작된 글쓰기의 경험은 어쩌다 보니 1년이 지났고, 완성되든 되지 않든 나의 글을 일주일에 한 번씩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의 조각을 내보이는 일이다. 누군가 달라고 한 사람은 없지만 용기를 내어 건네 본다. 한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주고 자신들이 느낀 감정을 주고받는다. 나도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떠오르는 감정들을 표현할 말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전부터 파마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질 않아 참고 있다고 말하자 “왜 우리가 파마하는 것까지 용기를 내야 해요? 그 용기는 다른 데 써요.”라는 말을 들었다. 웃으면서 넘겼던 그 말은 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겼다. 소심한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을 할 때도 큰 용기가 필요한 사람. 하지만 정말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는 회피해버리는 사람이다.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 어렵다. 두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이 돼서 어렵다. 어려서부터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어 본 경험이 없다. 부모님은 맞벌이였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내가 가진 고민을 나눌 수 없었다. 나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는 알아서 잘하는 아이, 말썽부리지 않는 아이, 어른들 말을 잘 듣는 아이였기에 나는 내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느껴지는 감정들을 무시하면서 혹여라도 그 감정들이 겉으로 드러날 때면 외면하면서 살았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 싫어서 눈치를 보며 모두를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며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려고 애썼다. 나의 불편함은 사소한 것이라고 넘기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제일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중반기를 살아오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런 순간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살면서 가장 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순간들을 이제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비어 있는 내 마음을 채우고 있다. ‘누가 내 이야기에 관심을 둘까?’ 생각했지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내 시간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목소리로 글을 읽어 나간다. 고요한 공간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내 목소리만 울리는 그 시간이 일주일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며 비어 있는 마음에 다정함의 감정들을 채워 넣는다. 그렇게 외면했던 마음을 바라보며 ‘나’의 조각을 맞추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