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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쓰는 사람 05화

점성

#팬티입은늑대 #윌프리드루파노 #마야나 이토이즈 #키위북스

by 수키
무엇을 삶의 이유로 두어야 할까?


뉴스를 좋아하는 아이가 요즘 푹 빠진 취미 활동은 노래 만들기다. 자신이 본 뉴스 내용을 바탕으로 가사를 만들어 따라 부르는데 처음에는 그러다 말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점점 아이의 감정이 격해지는 걸 느끼고 걱정이 되었다. 앞뒤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자극적인 내용만을 받아들이는 아이에게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최대 관심사는 단연 ‘싸움’이다. 어려서부터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아이라 걱정되는 마음에 싸움의 기색이 보일 때면 단호히 개입했다. 아이의 태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방어하는 모습이 다소 과도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이는 나에게 ‘비눗방울 경계’에 대해 자신이 배운 것을 알려 주었다. 서로의 경계를 터뜨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만약 상대방이 내 비눗방울을 터뜨리면 싸움이 일어난다고 했다. 아이의 학교 교실을 떠올려보았다. 처음 입학식 때 교실에 들어갔을 때 책상과 책상 사이가 좁아 몸을 옆으로 돌려야 그사이를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아이는 내 몸보다 더 작으므로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지만 하나씩 배열된 책상에서 친구와 이야기라도 하려고 멈춰 서 있다면 그곳을 지나가려던 다른 아이와의 비눗방울과 터질 게 분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대처할지 짐작되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만들었다며 가방에서 꺼내 보인 작품은 자신을 향하는 가치 있는 말이 가득한 종이 액자였다. 말풍선마다 예쁘게 색칠까지 한 아이에게 “이렇게 예쁜 말을 할 줄 알았어?”라고 칭찬하자, 아이는 “이렇게 해야 도장을 받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


살면서 부모에게, 학교에서 많은 ‘예쁜 말’들을 배운다. 늘 영상으로, 책으로, 활동으로 이어지는 그런 교육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어려서부터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아이를 기르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를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아무리 가르친다고 한들, 반복되는 상황에서 아이는 늘 같은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내가 훈육한다고 한들, 늘 반복되는 상황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방어 또한 한정적이었다. “다른 애들은 다 그렇게 안 하는데 왜 나만 그래야 해?”라고 따져 묻는 아이에게 “너는 그 애들이 아니잖아.”라는 나의 말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루는 아이에게 친구랑 싸우고 나면 어떤 기분이냐고 묻자, 속이 시원하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같은 싸움은 반복된다고 했다. 싸움의 근원은 자신이 만들어 낸 두려움이다. 상대방의 작은 공격이 나를 위협한다는 불안이 큰 나머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이 과도하게 앞서 나간다. 가수 션이 텔레비전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아이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줄은 모르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알아요.” 나도 아이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던 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묻는 말에 아이는 대답을 망설였고, 나는 그런 아이에게 ‘사랑’이라고 알려주었다. 내 대답을 들은 아이는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나를 꼭 안아주었다. 경계가 사라졌을 때 두려움도 사라질 수 있다. 경계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단어 ‘사랑’. 아이와 나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아는 ‘사랑’을 살아가면서 실천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교육청에서 진행하는 부모 교육 연수를 듣던 날, 효율적이고 빠르게 판단해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며 새롭게 도입되는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가 기술의 속도를 꼭 따라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모든 일은 제대로 기능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앞으로의 미래는 그런 시간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작은 화면 앞에서 큰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살다 보면 내가 지식으로 배워서 아는 것보다 직접 경험하면서 알게 되는 것에 대해 더 큰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아이에게 단순히 ‘1+1=2’를 가르치는 것은 쉽지만 ‘1+1=더 큰 1”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데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과 기회를 빼앗아 간다. 그래서 충분한 경험과 생각을 할 수 없어지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들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경계하게 된다.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안전해지고 싶은 마음이 함께 우리의 비눗방울 경계도 커진다. 점성이 약한 비눗방울일수록 작은 충격에도 금방 터져버리고 만다. 나는 아이와 함께 잘 터지지 않는 비눗방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점성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지만 사랑이 부족하다면서 안아달라는 아이를 바라보며 아직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가치에 대해 가르쳐 줄 시간이 늦진 않았다고 어렴풋한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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