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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타인

#섬 #아민그레더 #보림

by 수키
‘타인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타인의 기준은 무엇일까?’
‘섬은 평화로워졌을까?’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평균이라는 잣대를 만들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분리하고 외면하는 데 사용한다. 무언가를 향한 막연한 불안감은 낯선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도 있지만 쉽게 선입견을 만든다.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어느 날 동생이 외동 생활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왜 외동이냐고 물어보니, “언니는 이제 외국인 노동자잖아.”라고 얘기했다. 그렇다. 나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도 일하고 있는 외국인을 만나면 예전의 모습이 생각나서 동병상련의 느낌이 있다. 아민 그레더의 《섬》은 표지에서부터 하얀 바탕에 높게 솟아 있는 검은색의 성벽이 대비되어 다소 무서운 인상을 준다. 어느 날, 그것도 아침부터 허름한 뗏목을 타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한 남자가 섬으로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남자를 보자마자 돌려보내자고 한다. 바다를 잘 아는 어부 덕분에 낯선 남자는 섬에 남게 되지만 갇혀서 지내야 했다. 그러다 다시 마을에 남자가 나타난다. 그냥 나타났을 뿐이다. 남자는 배가 고팠지만, 사람들은 자신들 몫의 식량을 나눠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남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람들은 불안해하다가 결국은 파도 속으로 떠밀어버린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이방인. 다른 곳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섬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남자의 운명이 슬펐고, 유학 시절 나의 모습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처음 3개월은 가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는 내 힘으로 살자고 굳게 결심했었다. 서툰 일본어로 운 좋게 초밥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게에 온 몇몇 손님들은 내가 서빙을 하면 한국 사람은 싫다고 내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면전에 대고 무안을 주었다. 그리고 외국인 손님들이 오면 나에게 귓속말로 그 손님들에 대해 흉을 보는 직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안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 지나서 중년의 남자 손님 한 분이 가게에 들어왔다. 자리를 안내하고 기다렸다가 주문을 받으러 갔는데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생신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하며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다음 날 점장님이 불렀다. 어제 왔던 손님이 생일을 축하해 주었던 아르바이트생에게 정말 고마웠다고 백화점 고객센터로 전화를 준 것이었다. 그 일 덕분에 백화점에서 친절한 직원상을 받았다(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다시 눈시울이 붉어진다).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많은 국적의 사람들을 만났다.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만나 친구가 되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던 경험을 떠올리면 누군가를 낯선 타인이라는 이유로 싫어하고 기피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친하게 지냈던 일본인 친구에게 유학을 해보라고 넌지시 얘기해 본 적이 있다(매사 호기심이 많았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유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답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포용력을 갖기 어렵다. 삶은 내가 경험한 만큼 보인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인데 마냥 불안에 떨며 손바닥만 한 세상에 산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와 TV를 보다가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이 일하고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아이는 왜 자기 나라를 두고 여기까지 와서 사냐고 물었다. 그럴 때면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언젠가 너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살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스웨덴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타고 싶은 기차가 있다며 금세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불안해서 고립되지만, 그 고립은 계속해서 또 다른 불안을 만들 뿐이다. 이미 코로나19 시대에 겪어 보지 않았던가.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불안을 겪어보면서 자신만의 면역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40대가 되어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도 어쩌다 보니 아이에게 낯선 것을 조심하라고 가르치게 된다. 경험을 통해 한창 자기 삶의 폭을 넓혀야 할 시기인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통제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아직은 품 안의 자식이라 엄마의 염려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가족의 품을 떠나 독립하는 날이 오면 낯선 것을 향해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을 경험해 보는 방법도 알려줄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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