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외면한 책임

#로쿠베조금만기다려 #하이타니겐지로 #초신타 #양철북

by 수키
‘어른들은 왜 로쿠베를 모른 체했을까?’
‘아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로쿠베를 구했을까?’
‘어른과 아이의 마음은 무엇이 달랐을까’


로쿠베는 어쩌다가 구덩이에 빠졌을까? 아이들은 로쿠베를 지나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로쿠베를 구할 수 있을지 고민의 과정을 담은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를 모임에서 읽고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한창 조경 정리로 단지가 어수선했을 때 쌓여 있는 나뭇가지 근처에서 놀고 있던 동네 아이들이 다급히 엄마들을 불렀다. 잘린 나뭇가지 틈 안에 까치가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까치를 에워싸고 소란스럽게 하는데도 까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앉아 있는 상태에서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아이가 얼른 까치를 구해줘야 한다고 했다. 나도 까치가 걱정스러웠다. 우선 까치가 무서워서 움직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니 멀리서 지켜보자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까치를 구해야 한다며 당장 경비 아저씨를 불러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아이를 말렸다. 까치가 다시 날아갈 수도 있고 당장 구해줘야 할 만큼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신에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까치가 떨어져 있는 위치를 전달하고 아이를 안심시켰다(동네 아이들은 한참을 까치 곁에서 떠나지 못했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으로는 온통 까치 걱정뿐이었다. 틈틈이 거실 창을 내다보며 확인했다. 다음 날 아침, 등교하기 전에 까치가 잘 구출되었는지 보고 가겠다는 아이에게 내가 확인해 보겠다고 말했다. 아이가 등교하자마자 까치가 있던 곳으로 가보았다. 까치는 죽어 있었다. 미안했다. 아니 어쩌면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 같다. 그래서 아이가 직접 까치를 확인하지 못하게 말렸던 것이 아닐까? 아이의 말대로 경비아저씨에게 바로 알렸다면 죽지 않았을까? 관리사무소에 연락하니 담당자에게 전달했는데 퇴근 시간이라 마지막까지

확인은 못 했다고 했다. 사체라도 치워달라고 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보게 된다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나는 왜 더 적극적으로 까치를 도와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아이는 왜 그렇게 까치를 도와주려고 했을까?


김인정 작가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나와 닮은 것, 자신이 공명할 수 있는 것을 대개 지지했다.”라고 말한다. 아이는 자신보다 약한 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마음을 외면했다. 까치를 구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었다. 구덩이에 빠진 로쿠베를 구하기 위해 아이들은 엄마들

을 불러오고,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무관심하다. 사람이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한다. 생명에 경중은 없다지만 작고 힘없는 동물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보다 등한시된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의 어른들은 로쿠베를 구하기보다는 그 상황을 구경만 했다.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다가 마침내 로쿠베를 구덩이에서 구한다. 이런 아이들의 행동은 어른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더 알기 때문에 가능했을까?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생명은 소중하고,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 마땅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실천하면서 살기란 어렵다. 이론과 실기는 다르다. 살다 보니 삶이란 배운 대로 되지 않았다. 생명에도 더 귀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었고, 어려운 사람은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도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먼저 나설 필요가 없다. 내 경험상 그럴수록 더욱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뿐이었다. ‘낄끼빠빠’라는 유행어가 있다. 적당히 눈치껏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말인데 언제가 낄 때이고 언제가 빠질 때일까? 그 기준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적당히, 눈치껏이라는 말은 주관적이라 그 의미가 모호해진다. 열정적으로 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그 회사가 좋고, 회사 사람들이 좋고, 내가 하는 일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몇몇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열심히 하든 안 하든 받는 월급은 같고, 내가 열심히 일하면 결국 사장만 좋은 것 아니냐며 적당히 하고, 뭐든 시키면 먼저 거절해야 한다고 했다. 적당히 하라고 했다. 그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했다. 정말 적당히 하는 것이 현명한 걸까? 국어사전에 ‘현명하다’는 어질고 슬기로워 사리에 밝다는 뜻으로 나온다. 지금껏 내가 삶을 살아오면서 적당한 것은 현명하다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를 읽고, 떨어진 까치를 구하지 못한 경험을 되새기며 책임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로쿠베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아이들은 어쩌면 구덩이에 빠진 로쿠베가 혼자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외면했다면 로쿠베는 그날의 까치와 같은 운명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의 이런 행동은 어떠한 목적도 의도도 없는 순수한 책임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아이에게 늘 책임감을 가지라고 했지만, 그날 나는 아이의 책임감을 외면했다. 이 그림책을 볼 때마다 아이와 까치에게 책임감이 없었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이전 06화나는 잘 존재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