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영혼 #올가토카르축 #요안나콘세이요 #사계절
‘영혼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영혼이 있을까?’
‘영혼이 없다면 나도 없는 걸까?’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매일매일 무언가를 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일상을 보내고 있다. 틈틈이 프리랜서 일을 하고 있고, 대부분의 육아를 도맡아 하고 있다. 책을 좋아한 독서 모임은 2년 동안 잘 유지하고 있고, 그림책을 좋아해서 동네 책방에서 꾸준히 그림책도 읽고 글도 쓰고 있다. 어린이책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올해부터는 어린이 도서를 읽고 토론하는 모임도 새롭게 시작했다. 오전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면서 보내지만, 아이가 하교한 후에는 엄마의 위치로 돌아가 아이 학원의 픽업과 집안일로 하루의 나머지 반을 채운다. 가족들이 가끔 전화로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물어올 때면 “이것저것 하느냐고 바쁘게 살고 있지.”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고 있다고 하면 안 될 것처럼 하루 24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그리고 바쁘게 살아갈 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책방 수업 <새로 나온 그림책 톺아보기>에서 우연히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책들을 만났다. 그만의 독특한 그림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잃어버린 영혼》은 그가 그림을 작업하고 글은 올가 토카르축이라는 작가가 썼다(이 그림책을 보기 전까지 나는 이 작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올가 토카르축은 201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글과 그림의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하나의 작품과 같은 그림책을 만날 때면 출판사와 편집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 그림책은 한 남자가 의사로부터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진단을 받으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영혼을 기다리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마침내 영혼은 남자를 찾아온다. 우리는 흔히 “너무 영혼 없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가볍게 던졌던 이 농담이 진지하게 다가왔다. 나는 영혼을 갖고 있을까?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습관이 리액션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반응이 좋아서 이야기할 맛이 난다고 말해주지만 친해지고 나면 영혼 없는 리액션이라고 말하곤 한다. 늘 똑같이 웃고 손뼉 치며 열심히 들어줬는데 왜 영혼이 없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매번 똑같은 리액션을 하는 모습에서 그렇게 느껴졌겠구나 싶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이야기를 듣는데 습관처럼 같은 리액션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쉽게 반응하던 나의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대신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더 잘 들으려고 집중한다. 들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리액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나의 습관은 배우는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알고 싶고 그래서 자꾸 틈만 나면 배우게 된다. 배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쉽게 발을 넣은 만큼 빼는 것도 쉽다. 한마디로 시작은 좋으나 그 끝이 늘 흐지부지했다. 일본에서 유학 후 귀국했을 때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이것저것 배우러 다녔다. 본가가 청주라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타이포그래피를 배우겠다며 서울까지 다녔었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배운 것이 아니다. 그냥 문자가 좋아서 배웠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진행하는 캘리그래피 수업도 열심히 다녔다. 해외여행을 갈 때면 그
나라의 문자로 되어 있는 책을 사고, 국내 여행 때도 헌책방에 가서 알지도 못하는 외국의 사전을 사기도 했다. 나는 새로운 것, 내가 모르는 것에 마음이 잘 움직였다. 배우는 모든 것이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마음으로 다녔기에 늘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경험해야 했던 배움이었을까’라는 의문도 든다. 혹시 나도 영혼을 기다려주지 않고 행동만 앞선 것은 아닐까? 그럼, 지금은 어떨까? 내 영혼은 지금 내 안에 있을까?
운동 삼아 요가를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겁도 없이 아쉬탕가 요가를 시작했다. 그것도 마이솔(정해진 동작을 모두 외워서 혼자 수련하는 방식의 수업이다). 열심히 아사나를 외우고 집에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요가 영상을 보다가 하타 요가를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임을 이어가는 아쉬탕가와는 달리 하나의 아사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집 근처에서 소규모로 하타 요가를 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일일 체험을 한 날 바로 등록했다. 평소 쉽게 긴장하는 내 몸에는 하타요가가 더 몸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동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정신을 더 집중해야 했다. 요가를 시작하기 전에 짧게 명상하는 시간이 가졌는데 색다른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온갖 잡
생각이 떠올랐다. 떠오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 깊이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냥 흘려보내기도 하면서 그 순간에 지긋이 집중했다. 명상을 시작하고 몸을 움직이는 날은 발가락의 움직임까지 느끼면서 나의 몸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요가도 명상도 하고 있지 않지만, 요가를 했던 5년이라는 시간은 내면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가 이렇게 나에게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수련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살면서 주변을 쫓느라 정작 자신을 놓치곤 한다. 영혼이 있거나 없다는 것은 결국 ‘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느냐’에 대한 문제인 것 같다. 바쁘게 살고 있을 때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저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하고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결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요가와 명상을 통해 느낀 감각으로 얻게 된 마음가짐이다. 서둘러 다음 동작을 하고, 더 잘하고 있다고 보여주기 위해 몸에 맞지 않는 과도한 동작을 하기보다는 한 동작을 하더라고 제대로 몸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만큼 했을 때 긍정적인 변하는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잘 생각해야 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