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앤서니브라운 #논장
‘어린 시절의 모습이 나일까?’
‘지금의 모습이 나일까?’
‘언제가 정말 내 모습일까?’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앤서니 브라운이라는 작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나도 그림책을 고를 때면 ‘이건 꼭 읽어 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작가이다). 그의 그림책 중 하나인 《터널》은 아이가 다섯 살 때 먼저 읽었었다. 당시 아이와 함께 읽었을 때는 사이가 좋지 않은 남매가 화해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책방에서 <그림책으로 철학하기>라는 수업을 통해 다시 읽고 내 안에서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 ‘나’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그림책의 면지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실내로 보이는 바닥에 책이 있고, 뒷부분의 면지는 마당으로 보이는 곳에 책과 공이 함께 있다. 떨어져 있던 것이 함께 있다. 여기에서 의심해 볼 포인트가 있다. 정말 책이 안에서 밖으로 이동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누가 옮겨 놓은 것일까? 책을 좋아하는 동생 로즈와 축구를 좋아하는 오빠 잭은 매번 다투기만 한다. 화가 난 엄마는 어느 날 “둘이 같이 나가서 사이좋게 놀다 와!”라며 내보낸다. 하지만 둘은 같이 놀기 싫어한다. 그러다 우연히 잭은 터널을 발견하게 되는데 무서워하는 로즈를 뒤로하고 혼자 터널로 들어간다. 한참 동안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오빠가 걱정되어 할 수 없이 터널로 들어가게 된 로즈는 돌처럼 변한 오빠를 껴안고 우는데 이때 오빠의 모습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게 된다.
물리적 몸은 하나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개의 ‘나’가 존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자라온 모습을 되돌아봐도 언제가 정말 내 모습일지 대답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시절 생활 기록표에는 ‘매사에 소극적인’, ‘조심성이 많은’ 등의 말이 쓰여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에 가입하여 콘서트 표를 사기 위해 은행 앞에서 밤새워 기다리기도 하고,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면 방송반 친구를 쫓아가 당장 우리 오빠들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우기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면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퇴근 후에는 홍대 라이브 클럽을 다니며 밤 문화를 즐기고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사람은 그날의 이야기 친구가 되곤 했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은 현실 육아
앞에서 하고 싶은 일을 절제하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40년의 삶 속에서 진짜 나의 모습은 어느 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중 하나를 콕 집어서 ‘이때가 진짜 내 모습이지!’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어려서는 타고난 기질의 영향과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을 것이고, 조금 자라서는 철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즐거웠을 것이다. 인생의 중반을 살고 있는 지금은 다양한 경험과 현재 처해 있는 환경 때문에 신중해졌을 것이다. 한때는 젊었을 적의 거침없던 모습을 그리워했었다. 반대로 무엇 하나 제대로 즐기고 있지 못하는 40대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점점 이런 모습에 익숙해지고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앞의 모든 것에 흔들리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면서 제법 어른스러워졌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한다.
사람의 모습이 꼭 하나일 수 있을까? 한때 유행했던 노래 중에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라는 가사가 있다. 내 모습도 꼭 이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는 여러 개의 ‘자아’가 있다. 그것은 능수능란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상황에 따라 휘둘릴 수도 있다. 지금 보이는 모습이 정말 내 모습일지 아니면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인지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지만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한참을 헤매다 보면 결국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데 단순히 순간의 어떤 모습만을 나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 않을까’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지금의 나’는 그냥 지금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나’ 역시 그 시간을 열심히 보냈을 뿐이다. 결국 자아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걸 이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되었다. 오늘도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잭과 로즈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보고 내 안의 다른 나와 만나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해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