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초상화 #유지연 #이야기꽃
‘엄마는 왜 자신의 모습을 감췄을까?’
‘내가 바라는 엄마의 모습은?’
‘나는 어떤 엄마로 남고 싶을까?’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는 임신하면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퇴사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임신했을 땐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그리고 운 좋게 프리랜서로 디자인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삶 또한 쉬운 건 아니었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24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장을 보고 요리를 했다. 요리가 서툴렀기 때문에 아이의 하원 시간이 되어서야 마칠 수 있었다. 요리를 마치고 부랴부랴 집 청소를 했다. 아이와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밥을 먹인 후 재우고 나면 그제야 나는 밀려 있는 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가 옆에 없으면 자꾸 일어났다. 마감이 급할 때는 아이를 안고 일하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시간 여유가 있으면 다시 방으로 데려가 재웠다가 나와서 새벽까지 일했다. 무슨 정신으로 그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남편은 밤에는 자신이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잠꼬대 같은 말일뿐이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육아도 살림도 집에서 일하는 내 몫이었다. 아이와 함께 엄마도 태어난다고 어느 육아서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처음 해보는 엄마의 역할을 하면서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의 것을 점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잘하고 싶어서 과한 욕심을 부렸던 걸까.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것이 두려웠다. 어렸을 때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 아이에게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다짐했었는데 현실 육아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내 일보다 아이와 관련된 일에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남편에게 어떤 아빠가 되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실망했었다.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과 의무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늘 사회생활에 바쁜 남편에게 육아는 관심이 없는 카테고리인 것처럼 느껴져서 서운했다(남편에게 몇 년 후에 같은 질문을 하며 만회할 기회를 주었지만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아이가 클 때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해당 시기의 발달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늘 노심초사했다. 육아 선배들이 첫째를 키울 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어떻게 자라는지 느낄 새도 없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처음부터 자녀 계획은 한 명만 생각했기에 더 육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희생하고 싶지 않지만 희생하고 있는 엄마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내 방식을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모든 시간을 아이를 위해 쏟아붓는 삶을 계속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네 단골 책방에서 경기도에서 지원하는 문화 활동 사업으로 6주간 그림책을 읽고 에세이를 쓰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그때 엄마에 관한 여러 권의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 가졌다(이글 역시 그 과정을 통해 쓰였던 글을 다시 다듬은 것이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골라서 가질 수 있었는데 나는 유지연 작가의 《엄마의 초상화》를 골랐다. 분홍색 테두리에 꽃을 배경으로 곱게 화장하고 사진을 찍은 나이 든 엄마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나도 이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그림책에서 엄마의 초상화는 두 가지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익숙한 엄마의 초상화와 낯선 미영 씨의 초상화. 엄마는 꿈꾸었고, 미영 씨는 결심하며 떠나고 그곳에서 원하는 초상화를 얻었다. 나도 미영 씨와 같은 모습을 원했는데 왜 내가 원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일까? 아이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만 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책임과 의무를 진다면 나는 희생하는 엄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아이를 위해 아이에게 맞추어 사는 것이 희생이 아닌, 엄마라면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하면 좀 더 편하게 엄마의 삶에 적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든 무언가를 마음 쏟아서 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었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문구가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이 특별한 6월 어느 날의 생생한 인상을 더 많이 간직할 수 있도록 우린 우리 몫을 포기해야만 해.”
조금 부끄러웠다. 엄마의 역할을 희생이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슬픔에 가두었던 나 자신이 옹졸하게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후로는 혼자 서울에서 자취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았다. 하지만 엄마라는 이유로 한순간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이 부당하다고 억울하다고 느꼈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과거에 묶여 현재를 비교하고 투덜거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저 멀리 알 수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 허덕이지 않기로 했다. 엄마가 된다고 내가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