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은 나
처음 홍콩을 방문한 건 13살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여행하며 넉넉한 재정으로 풍경과 음식을 탐미했을 테지만 사실, 자세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도 보았을 테고 빅토리아 하버에서 사진도 찍었을 텐데 생생히 기억나는 건 겨우 마늘 플레이크를 잔뜩 뿌린 게 요리, 그리고 그것을 먹다 이빨이 부러진 우리 엄마 정도. 단,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매우 애틋하다. 시골보단 도심을 좋아하는 나는 즐길 거리가 많았다. 높은 빌딩이 좋았다. 화려한 네온이 좋았다. 형형색색의 빌딩이 좋았다. 어딘가 나와 닮은 듯 다른 행인들이 좋았다. 된소리가 많아 억세게 들리던 언어가 좋았고 그 억센 언어 속 따뜻하고 다정한 행동들이 좋았다. 초등학생인 나에게도 느껴지는 고유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21살이 되어서야 홍콩을 다시 만났다. 홍콩영화를 통해서 말이다. 80년대 한국 청년들의 낭만을 책임지던 리틀 할리우드, 홍콩영화를 접했다. 계기는 조금 뜻밖이었다. 당시 좋아하던 남자 아이돌의 뮤직비디오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오마주 했다는 얘기가 들렸고, 그 남자 아이돌은 너무 좋아한 나머지 원작을 보고야 말았다. 그때가 시작이었을까, 그날을 시작으로 3일에 한 번씩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보았다. <중경삼림> 다음 <화양연화>를, <화양연화> 다음 <해피투게더>를, <해피투게더> 다음 <타락 천사>를, <타락 천사> 다음 <아비정전>을. 그래.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배우 개개인이 가진 분위기를 좋아하고 알록달록한 색감을 좋아하며 심장을 두드리는 대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바쁜 일상 속 얼어버린 내 날 것의 취향이 다시 서서히 녹아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무 행복했고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해 <중경삼림>을 한 번 더 봤다. 사실 두 번 더 봤다.
24살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 홍콩은 왕가위의 영화 그 자체였다. 술에 취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는 연인들을 보며 <타락 천사> 속 양채니와 금성무를 생각했다. 알록달록한 네온과 간판을 보며 <해피투게더>에서 택시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양조위를 생각했다. 노상의 음식점을 보며 <중경삼림>의 양조위가 허겁지겁 먹던 점심을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된소리 가득한 발음으로 떠드는 아저씨들을 보며 <화양연화> 속 양조위가 친구와 떠들던 장면을 생각했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그렇다, 나의 최애 배우는 바로 양조위다. 그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더 풀어가겠다.
그래서 나는 낯선 나라에 혼자 있음에도 무섭지 않았다. 코로나 시기에 나를 채워준 영화들이 이젠 내 주변에서 살아 움직였다. 냄새도 났고 맛도 났다. 내가 꿈에 그리던 도시에 내가 있었다. 복잡하고 번화하지만 따뜻한 느낌의 도시. 바쁘게 걸어가면서도 나의 휴대폰에 켜진 라이트를 끄라며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들. 밤에도 절대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 글을 쓰다 보니 무지하게 그립다, 홍콩.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가 난다.’ 이 유명한 문구는 사실 우리나라의 CF 광고이며, <타락 천사>의한 장면을 재해석한 것이다. 나에게 홍콩은 낯선 사람에게서 나는 익숙한 체취 같은 것이다. 남의 도시에서 맡는 고향의 향수. 어쩌면 전생의 고향. 과거엔 나의 취향으로 가득 찬 도시였고 좋아하는 배우의 출신지이며, 나의 이상향이던 곳. 홍콩은 지금, 나를 이루는 정체성이다. 나를 다시 꿈을 꾸게 했으며 달려 나갈 방향이 되어주었다. 가족 같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이자 그들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공간이다. 사랑하는 홍콩에 대한 기억과 추억, 가끔은 내 개인적인 생각을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