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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로로 Oct 09. 2024

<소설> 목소리 1

당신은 내 목소리를 상상해야 합니다.


  당신은 내 목소리를 상상해야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것 하나뿐입니다. 당신이 내 목소리를 상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나는 당신의 상상을 돕기 위해 노력하리라는 것입니다. 나도 내 목소리를 상상해야 하니까요.


  나는 과거의 일을 잊으려 했습니다. 나는 오래전에 입을 닫았고 그 기간이 오래되어 나조차도 내 목소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어렴풋이 그런 소리였어. 하고 짐작만 합니다. 글을 써 내려가는 와중에 내가 내 목소리를 기억해 내면 그때는 이 글이 멈출지도 모릅니다. 내 목소리를 찾고 싶지만 왜 목소리가 사라졌는지 깨닫고 나면 다시 입을 닫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매번 그랬습니다. 나는 지금 그 지겨운 도돌이표를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나는 그 시간이 짧았으면 합니다. 물론 이야기는 내 의지와 상관이 없겠지요. 지겨운 도돌이표를 끝내기 위해서는 당신이 내 목소리를 상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어쩌면 어느 길 어느 공간에서 들어본 적 있을지도 모릅니다. 매점에서 한입만을 입에 달고서 친구들 사이를 오가는 목소리였을 수도 있고 체육시간 축구공을 발로 차며 소리치던 골키퍼의 목소리였을 수도 있고 운동이 싫어서 운동장 구석의 그늘에 모여 앉아 그제 본 드라마를 소곤거리는 목소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교실에서 게임이야기로 열변을 토하는 목소리일 수도 있고 몰래 보는 만화책에 키득대는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목소리도 내 것이 될 수 있지만 내 목소리는 단 하나였습니다. 너무 어렵나요?     


  오래전에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내 목소리가 세상을 돌아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대통령이 취임하던 해였죠. 그런 것이 별로 상관없는 나이에 그런 것이 별로 상관없던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죽였다고 말하기보단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봤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했기 때문에 그렇게 믿었습니다. 당신의 상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힘든 이야기를 꺼냅니다.


  죽은 그 사람이 만약 살아 있다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요. 그에게도 미래가 있었을 텐데 제가 그것을 앗아간 거겠지요. 정해질 리 없지만 살아있다면 엄연히 존재할 한 인간의 미래가 나 때문에 죽음으로 확정이 됐다는 거잖아요. 그 사실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제 기분은 어떨까요.

  나는 그가 지금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을 칩니다. 어른이 된 소년은 무엇이 되어도 용납이 되지 않으니까요. 예쁜 애인을 사귀며 좋은 차를 몰아도 안 됩니다. 좋은 직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서도 안 됩니다. 그저 그런 회사에서 비루하게 사회생활을 해서도 안 됩니다. 막노동 일용직에 일당을 받으며 보람된 하루를 보내도 안 됩니다. 하물며 진창 같은 인생을 살면서 병이 들어 골골거리면서 사는 것도 안 됩니다. 버림받고 버려지고 세상 모두가 외면하고 어두운 교도소 안에서 지난날을 반성하며 살아 있어도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죽은 그 상태가 가장 어울립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게 저를 살아있게 합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요. 특별하고 멋진 사람. 담대하면서도 집요하고 영민하면서도 우직한. 그리고 착하면서도 사악한. 그 어떤 무언가가 되어 있으리라는 것을요. 정상적으로 제 수명을 다하고 살았다면 악인이든 성인이든 위대한 인물로 백과사전에 이름을 새기고 죽었을 거라는 걸 저는 확신합니다. 이미 그 작은 학교에서 죽기 직전 그러했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죽은 뒤 많은 이들이 그와 비슷한 말을 했으니까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죽은 그 사람은 당신이 잘 아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잘 아는 그 사람은 당신의 아들이었고 동생이었고 친구였습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살았던 우리가 모를 리 없는 그 이름. 학교에 꼭 하나씩은 있을 것 같은 흔한 이름.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네요. 우연이라도 입에 올리면 며칠이 재수가 없어요. 당신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징크스입니다.

  의아하지 않나요? 내가 왜 이토록 이미 죽은 그를 미워하고 있는지.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죽은 사람은 저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부르든 그것은 그의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입니다. 반 친구, 동네 친구, 학원 친구, 나이만 같아도 얼굴만 알아도 우리는 친구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하잖아요. 나와 관련 없는 사람에게 내가 없는 공간에서 나를 친구라 불러주는 일은 나로서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며 나를 부를 때 친구라는 단어를 써서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건 나를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만들었거든요.

  죽은 그가 친구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뜻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친구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나를 친구라 부르면서도 친구에게는 해서는 안 되는 짓거리들을 많이 했단 말이죠.


  친구는 친구에게 잔반을 먹이지 않아요. 친구는 친구에게 욕을 먹이지 않아요. 친구는 친구에게 똥을 먹이지 않아요. 친구는 친구에게 엿을 먹이지 않아요. 친구는 친구에게 해가 되는 그 모든 일을 하지 말아야 해요. 친구는 사람을 친구라 부르면서부터 동등해져야 하는 겁니다. 친구가 친구를 부를 때도 친구여야 하기 때문이죠. 친구에 대한 제 상식이 그러했습니다.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친구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그러해야 하지 않나요? 제가 그간 믿어왔던 상식은 범용 될 수 없는 것인가요? 그런데 왜 죽은 그 사람은 저를 친구라 부르면서 제 모든 행동을 통제하고 높고 낮음을 구분하고 물어뜯을 듯이 다그치면서도 과시하듯 자신의 자상함을 주위에 공표했을까요? 그것은 마치 라이언 킹에서 사자가 한 입 거리 원숭이를 친구 삼아 주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만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돌아오면 상황은 잔인하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딱 그러했습니다. 사자 옆에서 도망칠 수 없는 원숭이. 돼지. 혹은 그보다 더 약하고 보잘것없는 무언가.


  죽은 사람은 저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제게 있어 친구라는 단어가 왜곡된 것도 그때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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