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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로로 Oct 14. 2024

<소설> 목소리 2

당신은 내 목소리를 상상해야 합니다.


  죽은 그 사람의 장례식에 많은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담임선생님을 필두로 반 전체 인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아 죽은 사람 한 명이 빠졌죠.

  육개장은 마흔세 그릇이 동시에 준비됐습니다. 죽은 사람은 육개장을 먹을 수가 없으니 마흔세 그릇이 준비된 겁니다. 육개장을 먹기 전에 앞서 마흔세 명이 죽은 사람의 영정 앞에서 예를 갖췄습니다. 대부분 죽은 사람에게 두 번의 절을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친구가 죽은 사람에게 절하면 안 된다며 아는 체를 하더군요. 나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절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어쨌든 마흔세 명이 모두 죽은 사람에 대한 예를 갖췄습니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두 발을 조심하며 빈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장례식장에서 먹는 육개장은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을 겁니다. 수군대며 멀뚱멀뚱 쳐다보던 아이들이 숟가락을 집어 들었고 수육은 금방 동이 났습니다. 몇몇은 오징어며 땅콩을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사이다도 호주머니 속에 챙겨 넣었습니다. 개중에는 말없이 깨작깨작 젓가락질만 하며 음식을 잘 뜨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죽은 사람의 어머니는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가늘고 긴 울음을 시작했습니다. 태연하고 천진한 아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울분이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말랐던 눈가를 다시 적셨고 흐느낌에서 시작된 작은 울음소리가 낮게 장례식장 바닥에 가라앉았습니다. 죽은 사람의 엄마가 내는 가늘고 긴 울음에 감수성이 예민한 몇몇이 훌쩍이기 시작했고 전염병이 도지듯 삽시간에 울음이 번졌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음악이 완성됐습니다.


  사람의 죽음을 마주친 첫 경험이 제게는 그랬습니다. 그 공기 분위기 섬세한 느낌의 감정 하나하나 모두 기억이 납니다. 그때 장례식을 방문했던 우리 반 마흔세 명 모두가 울었습니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요. 그중에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장례식장을 나설 때 죽은 사람의 엄마는 친아들을 품듯이 하나하나 꼬옥 안아주셨습니다. 그중에 역시 내가 있습니다.


  나는 왜 울었을까요. 이것도 당신이 상상해야 합니다. 너무 기뻐서요? 슬퍼서요? 그렇게 단순한 대답이라면 당신에게 상상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때 울던 아이들의 목소리. 기억이 나시나요? 그중에 내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어머니는 따뜻했습니다. 차가운 아들을 둔 사람치고는 의외로요.          


  제발 그 새끼 좀 죽여주세요. 앞으로 정말 시키시는 거 다 할게요. 평생 봉사하면서 살겠습니다. 제발요. 제발요. 제발. 제발요. 제발. 제발. 제발요. 제발요. 제발요. 제발. 제발. 제발요.     


  교회에 가면 항상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에게 수모를 겪거나 얻어맞는 날이면 꼭 교회로 와서 수십 분은 기도하고 돌아갔습니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럴만한 용기와 배짱도 없거니와 사람을 죽이는 일은 십계명에도 나오듯이 용서받기 힘든 대 죄악이니까요. 그러니 하나님이 대신 죽여 달라는 기도만 할 밖에요. 기도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더군요. 제게도 별다른 도리는 없었습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는 마음을 당신도 아나요? 죽음이 가져다주는 적막과 무서움을 알고 있다면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란 것도 아나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고 그 어떤 희망도 이야기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요. 천국과 지옥이 있지만 그건 논외로 하죠.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는 죽음의 공포를 여덟 살 때 알게 됐습니다.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보고서 말이죠. 병아리가 어찌나 목청껏 울어대던지 삐약 하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죠. 그래도 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울음이 가슴을 두근대게 만들었고 좁쌀이며 수수를 삼키는 그 작고 귀여운 병아리가 어떻게 닭이 되어 가는지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만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겠죠.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게 절 무척이나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만지지 말라는 주의를 들어도 나는 병아리를 손에 품었으니까요. 인형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털 주위를 미약하게 감싸고 있는 온기요. 생명만이 가지고 있는 기운이요. 인형에게는 절대 없는 그런 것. 죽은 그의 삶과 죽음을 함께 한 당신이라면 이해는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학교 앞 병아리의 귀결은 너무도 당연하게 죽음이 되겠죠. 살면서 더러 닭으로 키워내는 사람을 보긴 했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애정을 쏟아부어도 사람보다 오래 사는 닭은 없으니까요. 아이에게 죽음을 가르칠 때 그만한 매개체는 없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두근대던 심장을 느낄 수 있었고 허공을 가득 메우며 울어대는 소리가 예민한 어머니를 더 예민하게 만들던 병아리가 시름시름 앓더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걸 볼 때요. 병아리의 죽음과 마주하기 직전에 있는 꼬마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다들 이런 비슷한 경험 하나씩은 있겠죠? 그러니까 말입니다. 결국엔 그 미동도 않는 싸늘한 병아리는 살아있을 때 보여줬던 먹고 싸고 울고 날개를 퍼덕이며 뛰어다니는 그 모든 아름답고도 추한 행위와 단절되어 버리는 거죠. 죽음 하나로요. 죽음은 나와 병아리를 평생 갈라놨습니다. 여덟 살밖에 안 된 꼬마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축 처진 병아리를 마주하고서 든 생각이 뭐겠어요? 파묻어야 한다는 거예요. 누가 가르쳐 준 사람이 없는데 나는 단번에 그 생각을 했어요. 나와는 이제 함께할 수 없다. 그러니 땅속으로 묻어버리자.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참 신기해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요. 교회에 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아이가 교회에 갈 때마다 신에게 죽음을 기도하고 있었다고요. 그를 나와 단절시키고 싶었죠. 그 사람의 죽음을요. 그 사람이 웃고 떠들고 발표하고 축구하고 게임을 하고 먹고 싸고 때리고 욕하고 침 뱉고 칭찬받고 으쓱대며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을 살아있는 사람은 건널 수 없는 눈물로 흐르는 강 저편으로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요. 내가 정말 간절하게 신에게 빌었던 거거든요. 그를 그 강 저편으로 보내달라고. 그를 보낼 수 없으면 저를 보내달라고요. 나는 그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것이 너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 하던 때는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 것이 별로 상관없는 나이에 그런 것이 별로 상관없는 공간에서 제가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목소리가 짐작도 가지 않죠? 그래요. 내 감정에 대해서 당신의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가 있겠죠. 고작 이 정도 글에 당신이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 반에 마흔두 명의 학생 중에 내 편을 들어줄 누군가가 분명 있었을 테니까요. 내가 얻어맞고 반찬을 빼앗기고 부모를 욕보이고 있을 때 누군가는 말려줬겠죠. 그 어떤 누군가는 괜찮냐고 물어봐 줬겠죠.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그 사람과 나의 문제였습니다. 나머지 마흔두 명의 학생에게는 교실에서 벌어지는 흔한 풍경이었겠죠. 그와의 일그러진 관계도 흔한 풍경이었겠죠. 궁금해요. 나도 객관적으로 그와 나를 바라본다면 교실 뒤 벽면에 붙은 소식지를 바라보듯이 흔한 풍경의 일부처럼 바라보게 될지 말이죠. 화분, 시를 적어놓은 액자, 급훈처럼 분명 존재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것들.

  장담하건대 비굴하게 능욕당하고 있는 내가 급훈보다는 재미있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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