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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로로 Oct 30. 2024

<소설> 목소리 4

당신은 내 목소리를 상상해야 합니다.


  술이 다 떨어져 갈 때 즈음해서 나는 술을 구하러 밖을 나서야 했습니다. 사실 밖으로 나갈 구실이 필요했습니다. 눈치로 아는 거죠. 이쯤 되면 방을 비워줘야 한다는 것을요. 그의 옆에 있으면서 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습득했습니다. 밖을 나서려고 코트를 걸치기도 전에 그는 내 짝사랑의 옆으로 가 어깨에 손을 걸치고 뜨거운 입김을 불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술을 그녀의 입으로 밀어 넣은 후에 과자를 입에 물고 안주를 빙자한 입맞춤을 시도했습니다. 그 과자 이름이 벌집피자예요. 온전한 상태가 아닌 그녀는 입안에 벌집핏자를 머금고 몸을 뒤로 젖혔죠.

  아지트를 나서면서 들리던 그녀의 낮은 신음이 나를 뒤돌아보게 했습니다. 그는 내가 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죠. 오히려 봐주길 원했겠죠. 왜 사자가 쥐에게 힘자랑을 하는지 나로서는 지금도 이해 불가입니다.

  그녀의 몸은 우중충한 아지트와는 상당히 대조적이었습니다. 희고 아담했죠.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내가 그런 아름다운 나신을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을까요? 그 점에는 감사할 때도 있죠. 여자를 경험한 것이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지금에 와서는 말이죠. 평생 나는 아무도 만지지 못할 겁니다. 아무도 나를 만지지 않을 거니까요.

  술을 사러 나가야 하는 임무도 잊은 채 나는 그 둘을 쳐다봤습니다. 그는 나를 더 의식하고는 거침없이 투박한 손으로 제 짝사랑을 더듬었습니다. 그 투박한 손으로요. 투박한 그 손이 증거예요. 곱상한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었거든요. 그의 마음이 험하고 거칠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투박한 머리를 가진 살모사처럼 흰 허벅지부터 시작해서 타고 올라가더니 치마 속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산딸기를 먹는지 어쨌는지 한참을 나오지 않았고 결국 입에 그녀의 속옷을 물고 나오더군요. 토끼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 역시 희고 조그마한 속옷을요. 길을 가다 마주치면 상상한 적이 있었죠. 그녀의 치마 속을. 보니까 그냥 속옷이데요. 그냥 토끼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 속옷. 그 토끼는 필통에도 있었죠.

  그는 마치 세 개의 머리를 가진 뱀처럼 그녀의 몸을 물고 핥았는데 그 모습이 참. 뭐라고 당신께 더 말해야 할까요. 말하면 당신이 그릴 수 있나요? 쉽게 말해서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 있는 겨죠.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억지로 들이켰던 술의 취기가 다 사라져 있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더 움직일 수가 없었겠죠.


  그는 바지춤을 풀다가 멈칫 나를 보더니 한마디 했습니다. 섰지? 섰죠.


  서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시공이 멈춰있는 것 같았고 정지된 화면에 풀어헤쳐진 그녀만 꿈틀대고 있었죠. 섰거든요. 제가. 서 있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하고 흉물스럽고 더럽고 추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수치스러운 단어들을 다 갖다 붙여놔도 어울릴법한 모양이었거든요. 얼마나 더러운가요. 짝사랑이라 칭하던 사람이 눈앞에서 범해지고 있는데도 일어섰어요.


  그런 나를 보며 그가 웃었죠. 지긋이 뒤로 물러서면서 또 말했습니다. 해봐.


  마치 자기가 잡은 사냥감을 내어주듯이 아주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사냥에 성공한 짐승 따위에 비교할 수 없죠. 그는 그보다 더 담대했습니다. 잡은 사냥감을 먹지도 않고 양보한 거잖아요.


  조금만 더 읽어 주세요. 나는 지금 당신에게 내게서 가장 부끄러운 기억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말에 순순히 그녀의 몸으로 다가갔을 때를요.

  백옥 같던 그녀도 가까이서 보니 티가 보이긴 했습니다. 근데 그것조차 더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내가 감히 만질 수도 없고 말도 못 걸던 그녀가 말도 못 하고 흐트러져 있었다고요. 그는 재차 내게 말했습니다. 만져봐.

  그가 내 손을 잡고 치마 속으로 손을 가져갔습니다. 토끼는 이미 그의 손으로 처리된 후였죠. 화들짝 놀랐지만 나도 이내 그 따뜻함에 금방 적응했습니다. 내 손도 더러운 뱀이 되어 그 안에 똬리를 틀었죠. 가슴도.

  그의 손이 내 다른 손을 잡아서 그녀의 가슴 위로 가져갔습니다. 키스도 해봐.

  나는 훈련된 개처럼 그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그녀의 입에는 그가 물어다 놨던 벌집핏자가 녹은 채로 입안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 과자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이유죠. 그 짭조름한 과자가 끈적대며 내 혀에 닿자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꿈틀거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개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죠. 그 소녀가 당해야 하는 일이 아닌 거죠. 또래보다 조금 더 예쁠 뿐인데요. 단지 내가 그에게 예쁘다고 말했을 뿐인데요. 고작 그런 이유로 내게 이런 일을 당해선 안 되는 거죠. 그 느낌 그 감촉 그 맛까지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황홀한 경험이지만 그 독이 너무 치명적이라 분명히 나를 산산조각 내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가 너무 쉽게 무너뜨리는, 나는 넘볼 수 없는 소녀. 그 소녀를 앞에 두고 있는 일은 한낱 쥐새끼가 사자의 만찬 앞에 공짜로 앉아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는 흐뭇한 미소로 바지를 내리고 사타구니를 주무르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감사히 여길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내가 대신 죄를 지어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거 해봐그의 생각과 자제력은 이미 소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가 무섭습니다. 나는 물러섰습니다. 내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시켰던 모든 죄는 이후가 상상이 가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아니었죠. 아닌 거였죠. 그는 물러서는 제게 말했습니다. 너 때문에 만든 자리라고요. 참 착한 아이예요. 그렇죠?

  대신 죄를 지어도 회개는 오롯이 내 몫이 되겠죠. 하지만 그때 눈앞에 일어나는 일은 살면서 절대 씻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찌해야 옳았을까요. 이빨을 드러낸 사자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솜털이 난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 위에서 내가 어찌해야 옳았을까요. 옳고 그름이 있었겠죠.     


  나는 달아났습니다. 그가 내게 욕을 하며 쫓아왔습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기도 했습니다. 이 새끼를 제발 죽여 달라고요. 아니면 나를 죽여 달라고요. 나는 많은 죄를 지은 인간이기 때문에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거란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지옥에 가고 싶을 만큼 그의 옆에서 죄를 짓는 일이 싫었습니다. 그날 어두운 밤 그를 피해 달아나는 길 내내 속으로 외쳤습니다. 제발 이 새끼를 죽여주세요. 그리고 내 기도에 응답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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