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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로로 Oct 23. 2024

<소설> 목소리 3

당신은 내 목소리를 상상해야 합니다.


  다시 나로 돌아갑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껄끄럽지만, 나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설교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귀를 세우고 두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말을 실행했습니다. 하물며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를 만나고서부터 매일 교회를 나갔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공인된 착한 아이였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에게 까지요.


  당연히 착한 아이인 내가 처음부터 그의 죽음을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죠. 그가 나쁜 행동을 내게 옮길 때면 나는 내 속에 자라나는 증오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 뺨을 내줘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마음속의 미움은 극복해야 하는 거였으니까요. 내게는 숙제와도 같은 하루가 매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성경 말씀을 듣고 실습에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매일 학교에서 검사 맡는 것 같았죠. 그가 나를 발로 차고 내 얼굴에 침을 뱉을 때면 수난당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떠올리며 그분의 관용을 되새겨야 하는 거죠. 하지만 매일 아침 어김없이 무시받으면 마음속에서 증오가 자라나고 그 미움을 내 속에서 확인하고는 회개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야 했습니다.

  내 미움이 자라지 않게 그를 회개하게 하여 주옵시고 어쩌고 저쩌고를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껴질 때에 기도의 내용을 바꾸게 된 거죠. 인간은 예수를 닮아가야 하는 거지. 예수일 수는 없잖아요. 

 그를 죽여주세요. 뭐든지 하겠습니다.라고요.     


  부족하죠? 그러니까 당신도 답답하죠? 도대체 어떤 끔찍한 일을 당했기에 이미 죽은 그를 잊지 못하고 평생 저주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지를요. 찬찬히 몇 가지만 읊어 볼까요?


  그는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였습니다. 대개의 천재들이 그러했듯이 말이죠. 에디슨도 호기심을 참지 못해서 수천 가지의 터무니없는 실험을 했잖아요. 문제는 그 호기심을 충족해 주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습득이 아주 빠른 아이라서 주변의 경험을 보고서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죠. 그 호기심을 채워주는 모르모트가 내가 됐을 뿐이에요.

  평범한 학생이 지갑을 훔치다 걸리면 어떻게 될까? 평범한 학생이 자전거를 훔치다 걸리면 어떻게 될까? 평범한 학생이 여선생에게 얼굴을 붉히는 질문을 하면 어떻게 될까? 평범한 학생이 초등학생을 괴롭혀서 돈을 뺏으면 어떻게 될까? 평범한 학생이 집에 있는 아버지 지갑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될까? 평범한 학생이 그런 짓을 하다가 걸리기 전과 후는 어떻게 달라질까? 평범한 학생이 담배를, 평범한 학생이 술을, 평범한 학생이 좋아하던 여자를 꾀어내어 음탕한 일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평범한 학생이 그런 짓을 계속해서 평범한 학생이 아니게 되면 그 평범했던 학생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런 학생의 죄악은 어디까지 용서가 가능할까?

  그 사람은 그게 왜 궁금했을까요. 나는 그런 짓의 결과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지만 그는 항상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했습니다.

  특별히 죄의식에 민감한 평범한 소년은 죄를 지을 수 없는 신분에 있는 아이에게 가장 좋은 실험의 대상이 됐습니다. 죽은 사람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아들은 목사의 아들이 되는 것이겠죠. 내게는 목사의 권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교회가 강간과 살인을 권장하는 탐욕스럽고 변태적인 집단이었다면 죽은 그 사람은 내게 사회봉사를 시켰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는 온갖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회유하며 다독였습니다. 뉘우칠 수 있는 죄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나는 지옥도 면할 수 있는 회개라는 아이템으로 유혹하는 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회개하면 된다. 그 모든 죄악을 덮을 수 있는 기적의 논리를 죄짓기를 망설이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통보하듯이 알려줬습니다. 착한 목자의 권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착한 목사의 착한 아들. 아름답고 착한 아이. 개씨발놈.          


  신이 내 기도에 응답했다고 믿었던 그날. 그날도 나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청소년이 소지하면 안 되는 술과 담배를 아지트에 박아놓은 일을 죄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법을 어긴 거지 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요. 진짜 죄는 그런 게 아니죠.

  나는 그의 지시대로 아지트로 내 짝사랑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녀가 아지트로 찾아오게 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추궁하듯이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서 물어봤고 나는 그저 또래보다 조금 더 예쁜 아이의 이름을 불렀던 거죠. 그게 전부입니다. 사실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녀를 아지트로 불러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나 혼자라면 덜덜 떨면서 말 붙일 엄두고 내지 못했겠지만, 그의 부름을 받은 사자가 되면 무서움이 사라지게 되죠. 전쟁터의 사자도 그와 마찬가지였겠죠. 나라를 대변하는 사신은 그 나라와 같은 대접을 받잖아요. 나도 그랬죠. 단지 대신 전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잘 생기고 똑똑하고 인기 많은 그가 하는 말이라면, 그가 은밀히 전하는 말이라면 솔깃하지 않은 여자가 그 동네에는 없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말이죠. 그의 앞에서는 또래보다 조금 더 예쁘다는 이유가 여자를 대단하게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아지트에 준비된 술은 그 여자아이가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녀는 그가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는지는 모르지만 뭐 짐작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아마 잘 나가는 그의 앞에서 촌스럽게 굴지 않으려던 거였겠죠. 나는 그런 사람들을 자주 봐왔습니다. 무리 중에 가장 잘난 아이의 행동에 맞추려고 하는 모습을요. 나는 지금까지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요. 무리에서 잘났다는 게 옳은 것은 아니잖아요? 왜 학교에서 제일 바보 병신인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잘난 아이들이 그걸 몰랐을까요.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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