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향 Apr 16. 2024

칠면조 아이스크림

 민트초코맛

괌에 살 때 한국에서 친구들이 참 많이 놀러 왔었다. 물론 가까우니까 여유를 내기가 수월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떠올려준 마음이 감사했고 만나면 반가웠지만서도, 물리적 거리가 워낙 가깝다 보니 맘만 먹으면 언제든 나도 찾아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두터운 소중함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그 작은 섬에서 5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처럼,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챙기지도, 한국의 추석을 챙기지도 않는 그런 날들을 살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한국 핸드폰에서 카카오톡을 켜고 가족들에게 선물과 인사를 전했지만 정작 나는 특별한 모든 날마다 괌에 있는 친구들이 각자 가족들과 파티를 하러 간다고 할 때 밀려오는 쓸쓸한 감정을 마주해야 했다. 이런 날들을 제외하면 나는 한국을 딱히 그리워하지도 않고 살았다.


그리고 작년에 미국 본토로 오게 됐다. 푸른 바다와 새파란 하늘이 매력적인 플로리다로.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나는 마치 모두와 영영 이별하게 된 것 같았다. 이제는 한국에 가려면 편도로만 최소 이틀은 잡아야 하는 아주 먼 곳에 살게 된 것이다. 새삼 두려워졌다.


이미 크게 자란 나라는 나무가 내렸던 뿌리를 조심조심 파헤쳐서 새로운 땅에 심어준 기분. 잘 돌봐주고 싶은데 옮겨올 때 얕은 잔뿌리들이 끊어진 통에, 단단하게 다져지지 않은 흙 탓에, 오롯이 서 있기가 쉽지만은 않던 기분. 그런 기분에 짓눌려 있을 때 이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서 초, 중, 고를 다 같이 나온 내 질긴 인연의 친구. 친구를 넘어서 가족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들 정도로 내가 각별하게 아끼는 이 친구가 ESTA 관광비자를 받아 최대 체류 기간인 90일을 꽉 채워 놀러 온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는 10월부터 1월까지 꿈같은 3개월을 함께했다.


친구는 채식을 한다. 나도 친구와 함께 하는 식사는 되도록 채식을 하려 노력했다. 덕분에 가지, 오트밀, 두부, 버섯, 배추, 과일 등 건강한 식재료를 이용한 맛있는 레시피를 여럿 터득했다. 외식을 할 때에는 동네에 몇 없는 비건 옵션이 있는 식당이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였기 때문에 매번 뭘 먹으러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호스트인 나는 스스로 명색이 미국 현지인인 터라 친구가 머무는 동안 새로운 것들을 많이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에너지 넘치는 친구를 위해서 태어나 처음으로 할로윈 코스튬을 맞춰 입고 클럽에 갔고, 라인댄스(미국 지방에서 유래한, 여러 사람이 방향을 전환하며 한 음악에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며 추는 춤)를 함께 배우러 갔고, 주말에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 데려가서 미국 오피스를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 최대 명절 중 하나인 Thanksgiving도 함께 맞이했다. 미국 가정에서는 백이면 백,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요리를 먹는다. 그래서 우리도 명절상에 칠면조를 택했다.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케이크

다만 칠면조 아이스크림을. 사진은 형편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아주 훌륭한 퀄리티의 아이스크림케익이었다. 칠면조 다리를 하나씩 나눠먹을 친구가 있어 기뻤고, 이렇게 특별한 대체육(?) 옵션이 존재함에 감사했다.


지나서 생각해 보니 친구를 가라오케에 한 번 데려가지 못한 게 아쉽고, 바닷물이 차다는 이유로 보트 한 번을 태워주지 못한 게 또 아쉽고, 우리 집 멍뭉이 때문에 다른 바닷가보다 한참 덜 예쁘고 협소한 도그비치(dog beach)를 훨씬 자주 가게 만든 게 미안하지만, 한 편 우리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블랙프라이데이 쇼핑을 즐겼고, 바닷가에서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어느 것보다 낭만적인 순간을 함께했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특별한 칠면조 아이스크림 다리까지 나눠 먹었으니, 다시 생각하면 참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3개월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