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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 May 16. 2024

당신의 철학

게으르지 않기

나의 철학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너무 막연한 질문이다. 만약 누군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본인만의 철학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열에 아홉은 말문이 막히겠지.

애초에 철학이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하고 커다랗다. 세상 모든 인문학을 철학과 결부시키는 게 가능한 마당에 그 속에서 '내 것'을 꼬집어내라니.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철학이요? 하고 아주 멍청한 목소리로.

질문 의도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붙었다. 요는 이거다. 어떻게 초심으로 돌아올 것인가?


당신을 초심으로 회귀시킬 마음가짐은 무엇인가. 당신의 초심은 무엇인가.


요즘 읽는 책은 두 드라마 작가의 철학에 대한 글로 시작한다. 가치관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오늘은 철학이라고 하자.

김수현 작가의 철학은 '자존심 지켜내기', 노희경 작가의 철학은 '거짓말하지 않기'다.

그렇다면 나를 관통하는 삶의 태도, 나의 가치관, 나의 철학은 무엇일까.


내가 왜 00을 하는지 생각해 봤다.

내가 왜 글을 쓰고, 연극을 올리고 싶어 하는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왜 인형을 만들고, 왜 책을 읽고, 대관절 태국어는 왜 공부하는지.

솔직히 '하고 싶어서'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먼저 할 테다.

'재미있어서'

글제가 주어진 상황에서 글을 쓸 때, 모두에게 통하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 네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야기는 그 주제를 받은 모든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라는.

재미는 포장지 같은 거다. 제일 바깥에 있는 것. 아주 직관적이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아주 중요하고, 쉽게 여겨지는 것.


포장지를 벗기면 조금 더 본질적인 게 나온다. 재미 속에 있는 걸 파헤쳐보는 거다.

어떤 게 재미있는 거지? 단순히 성취감은 아닐 거다. 게임에서는 못 느끼고 인형 만들기에서는 느끼는 걸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저런 것들이 재미있는지. 또 뭐가 재미있는지.

나는 시사교양, 사회인문, 사회과학, 역사, 미술이론 같은 주제를 다루는 영상 보는 것도 재밌어한다. 대학시절에는 학생회나 학보사, 사회운동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곤 했다.

사회를 깊게 들여다보는 것, 이해하는 것, 그 속에서 연대감 느끼는 감각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감각을.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재미있어서' 속에는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에, 최소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모습이 되는 데에 일조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아주 커다란 지향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다. 우리가 악으로 분류하는 이들조차 명분상으로는 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철학'은 아니다. 나의 지향점을 향하는 과정에서 내가 취할 태도, 그게 철학이 되겠지.


나는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일단 내 앞의 빚을 다 갚을 거다. 그러고 나서는 튼튼한 차를 한 대 사고, 노후를 위해 재테크를 돌릴 거다.

그러면 만약에 나 먹고살 걱정도 없고, 내 앞에 빚도 없다면 뭘 하고 싶을까? 로또 1등이 됐을 때, 내 앞에 놓인 현실의 걱정거리가 없다면 하고 싶은 일이 어쩌면 나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봐둔 곳이 몇 개 있다. 동네의 흉물들. 구멍 숭숭 뚫린 폐가와 공사가 멈춘 지 20년쯤 돼 가는 철골 구조물 같은 것들. 그 터를 사서 다 철거하고 나무를 심고 싶다. 과일나무, 꽃나무, 그냥 이런저런 나무들. 그냥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돈이 남으면 오래된 구옥을 사다가 적당히 리모델링하고 싶다. 나처럼 갈팡질팡하는 애들이 마냥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우리는 아이를 낳을 예정이 없는데, 남편과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죽을 때에 재산이 있으면 그걸 어떻게 할까. 재단을 하나 만들어서 연기하고 글 쓰고 싶어 하는 애들한테 조금이라도 돈을 나눠주기로 했다. 배곯을 걱정으로 제 꿈을 접지 않을 정도의 도움은 주고 싶다고.

내 마음대로 법안을 하나 통과시킬 수 있다면, 나는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거다. 미혼부도 그냥 자식을 출생신고할 수 있고, 성별이 어떻건 결혼할 수 있고, 여건이 되면 혼자서라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넉넉하지 못한 경제환경의 편모가정에서 자라 봤는데, 그런대로 행복했다. 옛 사상가들이 만들어둔 이론으로 따지면 공리주의인 셈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은 이런 모습이다.

세상이 좀 더 서로에게 포용력을 발휘하고, 쓸데없게 여겨지는 것들이 쓸모를 가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사실 나는 생각보다 편견에 쉽게 물드는 사람이다. 세상 모든 것에 예민하지 못하다. 가급적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은데.

그래서 나의 이상적인 세상을 위해 나는 좀 덜 게으를 필요가 있다.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데 덜 폐쇄적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부지런히 내 세계를 넓혀야 한다.

'게으르지 않기'

이게 내가 찾은 나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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