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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우정 Aug 19. 2024

갑자기 4배속

퇴거조치 바람

고객들은 아침 9시부터 출장스팀세차 예약을 잡을 수 있다. 예약이 많으면 5대, 적으면 2대 정도다. 비가 오거나, 비 예보가 있으면 예약이 없기도 하다. 10시부터 예약이 잡히고, 총 3대 정도라면 그날은 아침부터 여유롭게 시작하게 된다. 물론 3대라고 해서 일찍 마치는 것은 아니다. 고객들의 편의에 맞춰 시간을 잡으니 첫차는 10시, 두 번째는 오후 3시, 마지막은 5시. 이런 식이 되면 오후 7시가 다 돼서 하루 일정을 마치게 된다.


며칠 전 아침은 여유로웠다. 10시부터 일정이 잡혔고 총 3대다. 마지막 차는 잠실의 땡땡 아파트 지하,  벤츠 E클래스다. 2시 반경에 도착해서 차를 찾아내고 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은 주차장에 내려와 차문을 열어주고 올라갔다.


이때부터 4가지 사건이 생기면서 1배속의 하루가 갑자기 4배속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첫 번째 사건

차량의 외부에 초벌 스팀을 쏜다. 초벌로 스팀을 쏴서 모래 알갱이나 큼직한 오염을 제거해야 이후 스팀 미트질을 할 때 차량에 스크레치가 나지 않는다. 차를 한 바퀴 돌며 스팀을 쏜 후, 차량 내부에도 스팀을 분사한다. 주로 문틈새나 힌지, 그리고 손이 닿기 어려운 부분(의자 사이, 의자 주름, 컵홀더)에 스팀량을 조절해 분사한다. 여기까지 마치고 외부스팀 미트질을 위해 차량의 문을 닫고서 앞유리창을 봤는데... 맙소사!


앞유리창에 스크레치가 쫙쫙 나있었다. 자세히 보니 안쪽이다. 안쪽에서 앞유리를 닦은 적이 없으니 내가 한 짓은 아니다. 급한 대로 사진을 찍었다.  


시공을 처음 시작할 때는 없던 자국인데... 가만히 생각하니 내부 스팀을 쏜 이후 생긴 자국이다. 짐작하건대 앞유리 안쪽의 미세한 스크래치(유리가 아니라 썬팅지일 것이다)에 습기가 찬 듯하다. 어쨌든 차주에게 사진을 보내서 상황을 보고 한다. 내부 유리를 닦을 때 지워질 것이라고 안심도 시킨다.  내부 유리창을 닦으니 내 추측이 맞았다.


얼마 전 연재한 '수리비는 900만 원입니다'를 읽으신 독자시라면 아시겠지만, 이런 상황은 가슴을 다시 한번 철렁 내려앉게 한다. 내려앉은 가슴은 쿵쾅쿵쾅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놀란 가슴 진정 시키고 스팀 미트질을 마쳤다. 스팀호스를 스팀기에서 분리해 돌돌 감아서 집어넣었다. 땀을 닦고 한숨을 돌린 뒤 내부 세차를 할 차례다.


두 번째 사건

청소기를 준비하는데 아파트 경비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가온다.


"저기요. 스팀세차는 아니시죠?"

"스팀세차 맞습니다만, 스팀은 끝나고 지금부터는 손으로 하는 작업입니다."

"저희 아파트는 스팀세차 금지입니다. 아파트 관리실에 민원이 들어와서 제가 왔습니다."


경비는 아파트 관리실과 문자를 주고받더니 나에게 문자를 보여준다.


-퇴거조치 바람-


"관리실에서 나가시라고 합니다."

"세차 과정 중 반이상이 끝났고 지금부터는 조용히 손으로만 작업합니다. 좀 빨리 끝내고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무슨 힘이 있나요? 관리실에서 나가라고 하니..."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이 더위에 여기까지 진행했는데..."

"돈도 안되죠?"

"..."

"그럼 차주에게 전화하셔서 차주가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남은 작업까지만 하겠다고 하고, 관리실에서 저에게 그런 내용을 알려주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세 번째 사건

차주에게 전화를 걸어 내용을 전달하고, 청소기를 꺼내 급히 진행한다. 경비는 옆에서 계속 지켜보며 관리실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고, 그 와중에 지나가던 어르신 한분이 다가온다.


"출장세찬 가봐요? 대충 얼마나 받아요?"

"아 네... 쏘나타 급은 5만 원, 그랜저급은 55000원이고 SUV는 6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아 그래요? 5만 원!"

"쏘나타 크기 차량이 그렇습니다."

"그래요 5만 원!"

"어르신 차량이 뭐예요?"

"아반떼!"

"아반떼는 45000원입니다."


명함을 받으시더니 나중에 연락한다며 올라가신다. 관리실에서 연락이 없자 경비는 다시 한번 차주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채근을 한다. 이 와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네! 출장세차입니다."

"아까 그 뚱뚱한 양반 맞지요?"

"네 제가 좀 뚱뚱합니다만..."

"아직 거기 있어요?"

"네 아직 있습니다."


네 번째 사건

아까 올라가신 어르신이 다시 내려왔다. 콜라캔과 종이컵을 들고서...


"땀 많이 흘리던데 콜라 좀 먹고 해요"

"아... 감사합니다."

고객이 아닌 분(지나가시던 가망고객)이 음료수를 주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 와중에 경비가 어르신에게 말을 건다.


"어르신 여기서 스팀세차 하시면 안 돼요"

경비는 그 어르신이 차주인줄 알고 하는 말이다.


"이분은 차주가 아닙니다."


어찌어찌하여 세차를 마무리하고 아파트를 벗어나며 어르신이 주신 콜라를 원샷으로 들이키며 생각한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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