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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우정 Sep 02. 2024

여름은 가도 좋으리

계절 직업병

사무직 일을 할 때, 기획안과 사업계획서 등을 작성하기 위해 노트북으로 주로 일을 했다. 젊은 나이에 시작해서 눈이 나빠지는 줄도 모르고, 모니터를 죽어라 노려보며 일했다. 그러는 사이 뱃살은 늘어나고, 안경도 쓰게 되었다. 사무직의 직업병일 것이다. 어떤 직종이든 그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일의 특성에 따라 질병이 찾아오거나 신체의 변형이 온다.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부의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처럼, 생굴 껍질을 까는 아낙의 굽은 손가락처럼.


4년 차에 접어든 출장세차일도 처음엔 직업병이랄 게 있을까 했는데 슬슬 느낌이 오고 있다. 


출장스팀세차는 말 그대로 고객의 차량이 있는 곳으로 가서 스팀으로 세차하는 일이다. 스팀기는 차량에 있고 차에서부터 길게 스팀 호스가 차량을 둘러싸고 일하게 된다. 스팀 분사 장치는 마치 권총처럼 생겨서, 주로 손가락의 중지부터 약지를 사용해서 당겼다 놨다를 반복하게 된다. 스팀을 계속 분사하는 것이 아니라 차체를 닦는 타월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때문에 당기고 풀기를 해야 한다.  한대 당 스팀을 분사하는 시간은 20~30분 정도고, 시간 동안 스팀건을 쥐락펴락하는 횟수는 가늠하기가 힘들다. 


이렇게 일평균 4대의 세차를 하게 되면 스팀건을 쥐락펴락 하는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다. 스팀건의 방아쇠가 무겁진 않지만 당긴 유격을 유지해야 한다. 유격을 유지하려면 손가락 힘이 계속 유지돼야 한다. 일에 집중할 때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줄도 모른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일주일 작업 스팀건을 쥐는 손가락과 팔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한 달이 지나고 나니 숟가락을 들 때도 손가락과 팔목이 아팠다.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사무직으로 청춘을 보낸 나의 몸은, 몸이 아니라 인절미였구나'였다. 나는 손가락과 팔목에 근육이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용불용설이라 했던가. 타이핑과 클릭에 전념했던 나의 청춘은 내 사지를 말랑말랑한 인절미로 만든 것이었다. 그 인절미를 가지고 용을 쓰니 탈이 날 수밖에. 


방법을 찾았다. 스팀건을 권총형에서 레버형으로 교체했다. 레버형은 도시가스 중간 밸브처럼 생긴 것으로, 레버를 열면 스팀이 계속 나오는 형태다. 이런 형태는 작업성은 좋지만 스팀기에는 무리가 간다고 한다. 레버형은 스팀이 멈춤 없이 연속으로 분사되는 것으로, 스팀기에는 좋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권총 형태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은 계속해야 하고 나의 인절미들은 매우 더디게 육포가 되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깊은 겨울 아침 8시, 빌라에서 스팀세차 주문이 들어왔다. 눈이 내리길 반복하며 빙판이 되어 버린 골목을 조심조심 들어가서 빽빽이 주차된(빌라는 보통 9시 정도 돼야 차들이 빠진다.) 차들 사이에서 고객의 차량을 찾아낸다. 어렵사리 그 옆에 내 차를 대고 스팀기를 예열한다. 차량을 살피니 차체에 하얗게 성에가 쌓여 있다. 


'스팀의 온도는 180도니까 녹이면서 해야겠구나' 하고 헛된 생각을 품었다. 차체에 스팀을 쏘니 차량 표면의 먼지와 검은 그을음을 품고 샤르르 도장면에 얼음막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스팀건에서 나오는 수증기는 토출구에서나 고온일 뿐, 불과 15센티만 지나면 온도가 낮아지고 차체에 닿으면 주변 온도와 차체의 온도 때문에 바로 얼어붙는 것이었다. 


방법은 있었다. 스팀을 쏘는 동시에 타월로 닦는 것이다.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엇박자가 나게 되면 손등에 스팀을 쏘게 된다. 그렇게 방법을 찾았지만 리듬감이 꽝이었던 나는, 엇박자를 남발하여 손등에, 허벅지에, 팔목에 스팀을 쏘게 되고, 화상 연고를 대량 구매하게 됐다. 어서 빨리 따뜻한 여름이 왔으면...


여름이 찾아왔다. 7월 초, 지하 주차장이 없는 대단지 아파트 지상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본인 차와 장모님의 차를 동시에 의뢰한 사위 고객이다. 그야말로 이동 없이 한 곳에서 2대를 하는 일타쌍피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였지만 오전 9시니까 괜찮겠지 생각했다. 정신없이 내부 물품을 빼고, 스팀을 쏘고, 내부를 닦고, 외부에 물왁스를 버핑 하고, 유리를 반짝거리도록 닦았다. 마치고 시간을 보니 2대 진행하는 데에 3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한 바탕 땀을 쏟아내고 뿌듯하게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이 되자 뒷목과 팔뚝이 시뻘게지더니 오돌토돌 두드러기가 났다. 조금 지나자 가렵기 시작했고 참을 수 없게 되자 잠결에 긁고 말았다. 팔뚝은 군데군데 피가 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대책 없이 직사광선 아래에서 3시간 동안 땀을 흘린 대가였다. 직사광선 아래에서는 음식물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팔토시와 냉감 수건을 목에 두르고 일을 한다. 


겨울이 깊어지고 여름이 깊어지면 일하기가 참 어려워진다.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도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날씨에 따른 고통은 나만 겪는 것은 아니니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겠지' 하며 참고 견딘다. 오늘은 2024년의 초강력 더위가 한 풀 꺾인 첫날이었다. 참 일하기가 수월했다. 


돌아보니 6월부터 8월 말까지 장장 3개월이 폭서기였다. 뉴스에서는 해마다 여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앞으로 더위는 더 심해질 것이라고 한다. 기억력이 별로인 나는, 지금 또 시원한 겨울을 기다린다. 겨울에도 몰두해서 일을 하면 이마에 땀이 맺히지만 지금처럼 솟구치진 않으니까. 


정작 겨울이 찾아오면 이 지긋지긋한 여름을 그리워할 테지만... 이쯤 해서 여름은 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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