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2
베를린 2-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1) 세계대전과 분단
“너무 시시한데?”
베를린 이틀차, 도심 속 작은 섬 안에 중요한 박물관들이 모여 있다 하여 ‘박물관 섬’이라고 불리는 곳의 핵심 박물관들을 꼼꼼히 둘러본 뒤, 우리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앞서 방문한 로마, 피렌체, 빈의 박물관들과 비교하면 베를린 주요 박물관들의 컬렉션이 상대적으로 소박해 보인 탓이다.
남은 3주 동안 박물관 섬 밖의 훨씬 더 많은 박물관들을 방문하고 나서야, 베를린 박물관 섬 안의 박물관들이 이토록 시시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첫째, 독일은 유럽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식민지배의 기간이 짧았다. 독일 제국은 통일을 이룬 1871년 식민정책을 개시한 뒤 1919년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대가로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였으므로, 수백 년에 걸친 식민 정책의 결과로 ‘약탈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대영제국 박물관과는 국가 차원의 컬렉션의 양과 질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째, 연이은 세계대전 기간 동안 베를린 시가 폭격과 전시 혼란으로 인해 그나마 갖고 있던 컬렉션마저도 분산되어 버렸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일시적으로 베를린을 점령했던 소련군의 약탈과 문화재 반출이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셋째, 전후 독일의 국가정책은 두 번의 세계 대전에 책임이 있는 패전국으로서 역사적 과오에 대한 처절한 인정과 반성을 핵심으로 하였던 만큼, 예상컨대 그나마 지금 소유하고 있는 문화재나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도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것 같다.
이번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세 번째 이유에 대한 것이다. 베를린을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어디서든 세계대전과 나치정권의 만행에 대한 반성, 그로 인해 분단되었던 도시의 경험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적 장치를 만나게 되어 있다. 그 장치는 때로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한 곳에서, 그리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등장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계속 보여주면 싫어도 알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보게 된다. 그게 독일의 역사의식이자 후세대에 대한 교육 전략인 것 같았다.
그래서 베를린에서는 유럽의 여느 도시에서처럼 국가의 주요 박물관에서 고대 유적이나 대단한 미술작품을 찾기보다는, 도시 곳곳에 독일과 관계있는 근현대의 역사를 다룬 개별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가는 것이 도시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우리만큼 시간이 충분한 여행객이라면 얼마든지 헤매면서 깨달아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말해둔다. 지금 당장 박물관 섬에서 나오라! 그리고 도시가 반으로 분단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는 베를린 장벽 기념관,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나치 정권의 만행을 낱낱이 전시한 공포의 지형학 박물관과 유대인 박물관에서,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자식과 손자를 차례로 잃은 작가의 박물관에서, 오로지 베를린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 베를린이 세계대전과 분단을 기억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1. 베를린 장벽 기념관, East Side Gallery, 그리고 포츠담 광장
베를린은 2차 대전 이후 동베를린, 서베를린으로 분단되었다. 1961년부터 1989까지 28년간 도시를 물리적으로 분단하였던 총길이 167km의 베를린 장벽의 흔적은 아직도 베를린 곳곳에 남아 이 도시가 분단을 경험한 곳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도시가 이 분단의 경험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그리고 그때의 베를린과 지금의 베를린이 얼마나 다른지 새삼 느끼게 되는 곳들이 있다.
먼저 1.3km에 달하는 길이의 장벽에 전 세계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려 마치 하나의 전시관처럼 이를 연속해서 볼 수 있는 East Side Gallery(이스트사이드 갤러리)다. 쭉 따라 걷다 보면 그 유명한 '형제의 키스'도 만날 수 있다. 사실은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덩어리였던 장벽이 이제 각양각색의 그림으로 뒤덮인 예술품이 되어 있는 모습은, 전쟁 후 폐허에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예술의 도시가 된 베를린을 연상시킨다.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으로 향하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 있었기 때문에 '포츠담 광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곳에서도 장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도시의 꽤나 번화한 지역이었지만 분단 시 장벽이 지나가는 바람에 수십 년 간 완전히 폐허처럼 방치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폐허였기 때문에 통일 이후 더 개발하기 좋았던 것일까? 지금은 계획적으로 설립된 '소니센터'를 비롯해 현대적인 빌딩들이 밀집해 있다. 빌딩 숲 한가운데 쓸쓸히 남아있는 하나의 장벽과 그 양옆의 바닥으로 길게 난 선을 보고서야 이곳에 장벽이 지나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도시 곳곳에서 분단의 흔적인 장벽을 만나다 보면, 장벽과 분단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장벽을 넘다가, 혹은 넘었다는 이유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베를린 장벽 기념관은 야외 그리고 실내 기념관으로 나뉘어 있다. 실내 기념관에서 특히 장벽이 만들어진 뒤 1989년 붕괴되는 과정을 영상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2. 오버바움 다리
베를린 어느 곳이 분단의 역사와 관련이 없겠냐만은, 그중에서도 비교적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데다가 아름답기까지 한 곳을 꼽자면 오버바움 다리인 것 같다. 노랑, 갈색의 벽돌을 사용한 첨탑과 아치형 다리로 유명한 오버바움 다리는 동서베를린 분단 지점에 있던 탓에 분단 내내 한쪽과 다른 쪽을 잇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한 비운의 다리다. 통일 이후 1994년에 개통되어 지금은 갈색 다리에 노란 지하철이, 그리고 그 아래로는 자동차와 우리 같은 보행자가 지난다. 오버바움 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슈프레 강의 모습도 아름다워, 한 번 걸어볼 만하다.
(오버바움 근처 지역의 책방과 채식식당을 다녀온 이야기는 아래 참조)
https://brunch.co.kr/@tripterian/14
3. 노이어바헤와 케테콜비츠 미술관
우리나라로 치면 광화문 대로라고 할 수 있는 운터데린덴 거리를 따라 훔볼트대학을 향해 걷다 보면 노이어바헤(新신위병소)라는 이름의 범상치 않은 건물을 지나게 된다.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 단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 건물은 1차 대전에서 아들을, 그리고 2차 대전에서 손자를 잃은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 케테 콜비츠의 조각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집이다. 이 큰 건물에 공간은 하나밖에 없고, 그 공간은 오로지 이 작품 하나를 위해 존재한다.
방문자들은 어떠한 장식도 조명도 없이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채광으로 작품을 감상한다. 비가 오면 그대로 비를 맞는 어머니의 모습에 모두가 숙연해진다. 이렇게 사람들의 오감과 감정까지 순식간에 사로잡는 작가 케테콜비츠는 우리가 베를린에 오게 된 여러 이유 중 하나이므로, 이후에 별도의 글로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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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