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의 신호등은 무지개 빛깔

오스트리아 빈 2

by 김숲

빈의 신호등은 빛깔


빈 공항에 도착해 도심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숙소와 가까운 역에 내려 캐리어를 끄는데, 도로색깔이 심상치 않다. 그러고 보니 지나가는 전차도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무지개, 무지개, 무지개!


HJ_03825.jpg 무지개를 입은 트램


우리가 빈을 방문한 것은 6월 중순, 전 세계 성소수자들의 자긍심을 기념하고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인식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정된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Pride Month)'였다. 그래서인지 빈 곳곳에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가 보인다.


검은색 도로에 흰색이어야 할 횡단보도가 알록달록 무지개색이고, 알베르티나 박물관이나 벨베데레 궁전과 같이 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건물에는 무지개 깃발이 달려있다.


HJ_04836.jpg 알베르티나 뮤지엄 굿즈인 무지개 에코백


클림트가 초대 회장이었던 빈 분리파의 전시장인 제체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화려한 금색 돔 건물에 무지개 깃발이 걸려 더 화려해졌다. 그런데 제체시온 무지개 깃발을 등지고 길을 건너려는데, 문득 보행 신호등이 눈에 띈다.


HJ_04525.jpg 제체시온 정면에 무지개 깃발이 걸려있다


치마를 입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고, 혹시라도 우리가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친절하게 하트까지 그려두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하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려 보니, 제대로 본 게 맞다. 바로 다음 신호등에서는 바지를 입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고, 둘 사이에 또 하트가 있다. 아, 동성친구가 아니라, 동성커플을 상징하는 것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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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숨겨 둔 보물을 발견한 듯한 느낌에 사진을 찍어 두고, 이제 빈 어디를 가든 신호등부터 살펴본다. 자세히 보니 동성커플뿐만 아니라 이성커플 신호등도 있는데, 파란 신호일 때 꼭 치마를 입은 여성이 남성을 리드해서 길을 건넌다. 정말 재치 있는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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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행을 한 5-7월은 아무래도 앞서 이야기한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 즈음이다 보니, 공공건물에도 무지개 깃발이 걸려있었던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 보행신호 역시 일 년에 두 달 정도 팝업(Pop-up)처럼 설치해 두었다가 다시 원상복구를 하는 걸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 특별한 신호등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었다. 유럽에는 유럽방송연맹에 소속된 유럽연합 각 국가의 방송사가 매해 국가별로 1팀의 가수를 선발하여 국가 대항전을 하는 '유로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엄청난 인기다(한 해 최대 1억 8천 명 이상 시청). 1951년부터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진행된 이 대회에서 2014년, 오스트리아의 성소수자이자 드랙퀸 가수 '콘치타 부르스트'가 60여 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자의 국가가 다음 해 유로비전 대회를 개최할 수 있으므로, 오스트리아는 2015년 유로비전을 준비하며 도시 곳곳에 성소수자에 대한 관용을 주제로 한 여러 장치들을 심어두었다고 한다. 우리가 본 신호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원래 유로비전 개최 후 철거하려고 했지만, 인기가 너무 많아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마침 2025년 작년 유로비전의 최종 우승자가 또 오스트리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니, 올해 오스트리아에서 대회를 개최할 때에도 아마 이 특별한 신호등이 한 번 더 주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HJ_04121.jpg 숙소 근처에서도 무지개 깃발과 귀여운 보행신호를 발견!


일상에서 상시 마주할 수 있는 공공 디자인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양한 모습의 커플을 보며 자연스럽게 웃음 짓게 만드는 것, "차별은 안돼! 존중해야 해!" 이런 거창한 구호와 정책보다도 훨씬 효과적인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열흘간 빈의 곳곳을 누비면서, 항상 깔끔한 옷을 입고 다니는 모범생 친구 - 다가가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친구-의 인간적인 면모를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였던 로마, 피렌체, 빈, 베를린 중에서 가장 감흥도 기대도 없었던 빈은, 한 번 방문해 본 것으로 충분한 도시가 아니라 살면서 꼭 한 번씩 다시 찾고 싶은 도시로 남았다.


(이 글을 작성하며, 아래 비엔나 관광 홈페이지를 참조하였다. 빈의 특별한 신호등을 발견하고 싶다면, 아래 페이지 속 지도를 확인하라)

https://www.visitingvienna.com/transport/couple-lgbt-lights/



* 빈에서 세 번이나 찾아 간 북카페, 그리고 채식식당 이야기는 아래에서

https://brunch.co.kr/@tripterian/8

https://brunch.co.kr/@tripterian/10

https://brunch.co.kr/@tripteria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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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변호사커플, 때로는 집 안까지 타인의 삶을 가지고 들어오는 우리가 오로지 ‘우리’를 위해 보낸 66일의 기록. 같은 곳의 기억을 한 명은 글로, 한 명은 사진으로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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