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 BRAC
채식요리자격증이 있는 변호사, 어느 지역을 가든 따뜻한 독립서점과 맛있는 채식식당을 찾는 그의 ‘몸은 가뿐하게, 마음은 충만하게’ 여행하는 방법
*모든 질문의 답은 책 속에 있다고 믿고, 여행지를 고를 때 독립서점부터 찾아보고, 독립서점에 가면 무조건 책을 한 권 이상 사서 나와야 한다는 철칙을 지킵니다.
*채식을 지향하지만 의지박약으로 매일 실천하지 못하고, 적어도 새로운 곳에 갈 때만이라도 하루 한 끼 꼭 채식을 먹으려고 노력하며 맛있는 채식옵션이 있는 식당을 찾습니다.
# 해외 1. 피렌체 아르노강변 골목의 책방 겸 채식식당 ‘BRAC’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으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피렌체는 중세 토스카나 지역의 수도이자 르네상스의 발상지라는 찬란한 명성으로 유명하지만, 현대 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작은 도시다. 사실 인구 천만의 대도시 서울에서 온 내게 어디든 마음먹으면 걸어갈 수 있는, 서울의 1/6에 불과한 크기의 이 조그마한 도시의 스케일이 아주 소박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막상 한 골목에서 압도적인 규모의 두오모를 만나고, 다음 골목에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만나고, 또 다른 골목을 걷다 무려 70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베키오다리를 만나는 경험을 하다 보면 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꽁꽁 품고 있는 이 도시를 결코 ‘작다’ 고만 말할 수 없게 된다.
매년 1,500만 명 가까운 관광객들이 인구 40만이 안 되는 이 작고도 큰 도시를 찾는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주로 몰려 있는 도로를 살짝 벗어나 피렌체를 통과하는 ‘아르노강’을 향해 한 골목만 더 들어오면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진다. 이 아르노 강변의 아주 한적한 골목에, 간판도 눈에 띄지 않아 여기가 맞나..? 갸우뚱하게 되는 바로 그곳에 피렌체의 채식 문화, 그리고 예술 출판문화를 선도하는 브락(BRAC)이 있다.
Books(책), Recipes(조리법), Artists(예술가), Cooking(요리)의 첫 글자를 따 만든 상호명에서 바로 눈치챌 수 있듯 이곳은 주로 예술 서적을 전시, 판매하면서 동시에 채식카페 겸 식당이기도 한 복합문화공간이다.
2009년 와인애호가인 멜리사와 비건 셰프인 사샤가 ‘서로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현대미술 관련 책 출판과 맛있는 채식 요리)들을 합쳐보자’고 합심하여 만든 후 15년째 성공적으로 운영 중인 이 책방은 낮에는 커피와 와인 등 마실 거리와 비건 디저트를 파는 카페에서, 저녁에는 본격 채식 식사를 선보이는 식당으로 변신한다.
책방이자 카페이자 식당이라니… 여행을 하며 걸을 수 있는 반경에 있는 좋은 동네책방과 채식식당의 조합을 찾는 내게는 일석이조의 공간이기에 한 껏 부푼 기대감을 안고 이곳을 찾았다.
입구는 좁지만 막상 들어가서 보면 공간이 굉장히 넓고 깊다. 커피, 주류 주문 및 책 계산을 할 수 있는 중앙매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공간들이 뻗어나가 있어 탐험하듯 공간을 다녀야 다 볼 수 있을 정도다. 입구를 등지고 오른쪽 공간은 예술 관련 책들이 집중적으로 진열되어 있는 책방의 모습이고, 왼쪽 공간은 요리책과 와인이 즐비한 식사 공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 전에는 구분 없이 모든 곳에 앉아 커피나 주류를 즐길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이니 마음에 드는 곳에 앉으면 된다.
카페와 식당을 겸하고 있는 책방답게 세계 각국의 요리 그중에서도 채식 요리와 관련된 책들이 공간 한 편을 채우고 있다. 그 외에 그림, 사진, 영화 등 예술 서적이 주를 이루고 이탈리아 출신 소설가들의 책도 가득하다. 마침 2024년 올해 이곳 BRAC에 대한 소개를 담은 책이 출간되어 곳곳에 진열되어 있기에 펼쳐본다.
이 책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24년까지 BRAC에서 무려 총 1,800차례(!)의 북토크와 전시를 진행했다고 하니, 이곳에서 오고 간 수많은 대화와 아이디어들이 피렌체 출판과 예술에 미친 영향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방문한 첫날 비건 레드베리초콜릿케이크과 오트우유가 들어간 카푸치노, 거기다 이탈리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얼음 가득 담긴 아이스라테를 마시고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버린 우리는 BRAC의 비장의 무기인 저녁 식사를 위해 이틀 만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저녁에는 단품메뉴 주문도 가능하지만, 가능하면 세 가지 요리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사진 속 디너플레이트(1인 20유로)를 추천한다.
시즌마다 구성이 달라지는 4가지의 샐러드, 6가지의 파스타류, 7가지의 특별 메뉴 중 세 가지 요리를 골라 자신만의 메뉴를 완성할 수 있다. 이중 치즈가 들어간 일부 메뉴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건 메뉴이기 때문에 (어떤 메뉴에도 계란, 생선, 육고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완전채식을 하는 사람들도 수십 가지의 선택지 중에서 끌리는 조합을 고르면 된다.
디너플레이트는 단품메뉴에 비해 가격이 조금 높지만,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에게는 경력 18년의 셰프가 연구해서 선보이는 채식요리들을 한 끼에 세 가지나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고마운 구성이다. 우리는 고심 끝에 각각 완전히 다른 구성으로 조합하여 식사를 했고, 덕분에 한 끼에 총 6가지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BRAC의 셰프가 고심하여 구성하고 요리한 이탈리아 퓨전 비건 음식을 하나하나 시도하며, 책 속에 파묻혀 새로운 맛들의 향연에 즐거워하다 보니 이게 바로 ‘美食(미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단순히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닌, 그냥 그 여행지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하니까 먹는 것이 아닌, 나의 취향에 따라 고른 식당에서 처음 맛보는 음식을 정성껏 대접받는 이 경험. 나 때문에 두 달 좀 넘는 여행 기간 동안 유럽의 채식식당을 서른 곳이상 방문한 파트너 역시 지금까지도 이곳에서의 식사를 최고로 꼽는다.
주변 테이블의 대화에 귀 기울여 보니 영어보다는 이탈리아어가 훨씬 많이 들려온다. 우리 바로 옆 테이블의 노부부도 조금은 복잡할 수 있는 코스 메뉴 선택을 거침없이 한 뒤 디저트도 각각 하나씩 선택하는 것을 보아 단골이 틀림없다.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이 도시에서 동네 사람들이 분위기 있는 식사를 위해 찾는 책방 겸 채식식당이라니...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여행에서는 한 끼 한 끼가 소중하다. ‘피렌체 맛집’을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이나 글 중 열에 아홉은 안심과 등심을 모두 맛볼 수 있는 티본스테이크 식당을 소개하고 있다. 피렌체를 포함한 토스카나 지역에 가죽공예가 발달한 것 역시 이러한 식문화의 영향이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소중한 한 끼를 채식식당에 할애한다는 결심이 힘들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샌드위치, 샐러드같이 조금은 예상 가능한 채식을 넘어 이탈리안 음식의 재해석을 통해 미식을 경험할 수 있는,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 예술과 관련된 출판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BRAC에서의 시간은 새로운 경험에 열려있는 여행자들에게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거기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여행의 동반자와 함께 도보로 1분 거리에 있는 아르노 강변을 따라 걸으며 노을 진 피렌체의 전경을 바라본다면, 이보다 더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가 어디 있을까.
글 김숲, 사진 Hajin
* 이름 BRAC
* 위치 Via dei Vagellai, 18/R, 50122 피렌체, 이탈리아
* 책방 주요 큐레이션 예술, 요리
* 카페/ 식사 주요 메뉴 및 가격대 비건 디저트 메뉴 4-5유로대, 세 가지 메뉴 선택가능한 디너 플레이트 20유로
* 주요 장소들과의 거리 아르노 강변(도보 1분), 우피치 미술관 (도보 4분), 시뇨리아 광장 (도보 5분), 베키오 다리 (도보 6분), 두오모 성당 광장 (도보 1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