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쉬어 가는 여행 어때?
유난히 덥게 느껴졌던 그 해 여름, 더위가 아직 물러갈 생각이 없는 듯한 8월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삿포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삿포로는 우리나라처럼 사계절로 구분되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눈 축제로도 유명한 도시다. 물론 한여름에는 덥기는 하겠지만 여름에도 장마가 없어 습하지 않고 선선하며 상쾌한 날씨가 이어진다고 했다. 8월의 삿포로라면 한국의 찐득한 더위를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어릴 적엔 늘 아이들 위주의 여행을 다녔다. 모든 계획과 준비는 내 몫이었고, 여행은 그저 육아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성장한 뒤의 가족여행은 사뭇 달랐다. 내가 나설 일이 눈에 띄게 줄었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토록 바라던 수동적인 여행, 진짜 쉬는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8월의 삿포로는 정말 온화했다. 숙소는 스스키노 인근에 잡고 차량을 렌트해 이곳저곳을 다니기로 했다. 요즘은 인터넷만 검색해도 가볼 만한 곳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남편은 한국에서부터 이미 동선을 짜 놓았다. 곳곳의 풍경으로 전해지는 정서는 평안했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말이다. 역시나 여행업에 종사하는 남편은 또다시 스케줄에 얽매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조절하면서 쉬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남편은 계획한 일정은 반드시 해야 할 과제처럼 모두 빠짐없이 해치워야 했다. 수동적인 여행을 하고자 마음먹은 나는 남편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매우 피곤한 여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자 피식 웃음이 났다.
평소 하루에 천 걸음도 채 걷지 않는 내가 삿포로에서는 매일 만 오천 걸음 이상 걸었다. 발바닥에 불이 나는 느낌이었다. 오타루운하, 닝그루테라스, 오르골당, 비에이에서 유명하다는 나무와 폭포까지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아침에 일어날 때면 '아이고' 소리가 저절로 나왔는데, 이건 내 체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딸도 같은 소리를 냈으니 말이다. 매일 다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다리도 뻐근하고 몸을 풀고 싶은 생각이 들어 현지인들이 간다는 유명한 온천을 찾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간 일본온천은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았다. 예전에 유후인이나 히라도에서는 온천욕 효과를 톡톡이 봤었다. 몸의 피로가 풀리는 것은 물론이요, 피부에 즉각적인 광채가 올라왔었다. 그때 기억으로 기분이 한껏 들떠 아토피가 있는 딸에게도 좋을세라 노천탕에 들어가 물결을 느껴 보았다. 오잉? 보들보들한 느낌이 없었다. 일반 목욕탕이나 다름없는 뽀득한 물이었다. 에잇! 아쉽지만 뜨끈한 물에 다리라도 풀어놔야 했다.
'메가 돈키호테'안을 누비고 다니려면 말이다. 나는 특별히 살 물건이 없으면 쇼핑몰을 즐겨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은 반드시 가야 한다. 돈키호테 안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에 한번 놀라고, 촘촘히 진열된 물건들에 또 한 번 놀란다. '저런 걸 누가 살까?' 싶은 물건들까지 빼곡하다. 어지럽다.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던 탓에 몇 번이나 그곳을 오갔다. 영혼 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시선만 진열대 위를 떠돌았다. 눈은 바쁘게 이곳저곳을 보고 있지만 정작 구매욕구를 자극하는 물건은 없었다.
삿포로 여행에서 진짜 피로 회복제는 다름 아닌 우유였다. 체력이 바닥날 즈음이면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평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곳의 아이스크림은 우유맛이 강하게 느껴져 안 먹고는 못 배겼다. 우유가 담겨 있는 유리병마저 사랑스러웠다. (그때 가져온 우유병에 가끔 작은 들꽃을 꽂아 놓고 삿포로 여행을 추억한다) '우유가 우유지 뭐.' 하고 기대 없이 마신 우유가 너무 맛있어서 여행의 만족도를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이 만족으로 다가올 때의 기쁨은 두 배이상이다. 때로는 계획한 일정이 아닌 느슨함 속에서 오래 남는 의미를 만날 수도 있다.
평소에는 뭐든 문제 될 게 없다는 느긋한 태도의 남편이지만, 여행지에서 만큼은 유독 타이트하다. 세월 앞에 아쉬움을 토로해 본다. 아이들이 어릴 적 여행지에서의 내 모습이 저러지 않았을까.(복수당하는 걸까?) 남들은 쉬거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 여행을 다니지만 남편은 30년 가까이 직업으로 삼았으니 여행지에서의 계획과 실천이 몸에 배었을 테니 말이다. 가족여행을 할 때마다 이건 숙제로 남는다.
님아, 쉬어 가는 여행 어때? 가는 여행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