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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고NAGO May 03. 2024

나를 찾아서-[5]

두 달간의 여행 - (3) 우연함과 행복에 관하여

여행 첫날, 비행기를 놓치고 숙소를 잘못 예약해서 날린 돈만 벌써 100만 원. 악몽 같았던 숙소에서 체크아웃하고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두었던 숙소로 향했다. 숙소까지는 약 2km,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다. 백팩 1개와 짐이 가득 든 28인치 캐리어 1개. 한 달 여행치고 적은 짐이지만 2km를 걸어가기엔 무거웠다. 택시를 부를까 고민했지만 처음 유럽 런던에 온 만큼 많은 걸 눈에 담고 싶어 그냥 걷기로 했다. 한 손에는 캐리어 손잡이, 다른 한 손에는 지도앱이 켜진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걸었다. 평일 아침이라 출근하는 직장인, 등교하는 유치원생, 학생들이 보였다. 런던에서 사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는 'Angel'역 근처에 위치한 호스텔이었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짐만 맡긴 뒤 곧바로 나왔다. 목적지 없이 일단 걸었다. 배가 고팠지만 일단 무작정 걸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런던 거리를 구경했다. 그러다 이제는 정말로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런던에서 먹는 맥도널드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 맥도널드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런던에서는 피시&칩스를 먹어봐야 한다는 지인의 추천이 떠올라 지인이 알려준 식당을 검색해 보았다. 우연히도 걸어서 5분 거리에 그 식당이 있었다. 금세 식당에 도착했지만 아직 오픈 시간이 아니었다.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식당 주변을 둘러보던 중 11시가 되어 들어갔다. 유명한 가게라고 추천받았지만 손님은 나 혼자였다. 메뉴판을 받고 무얼 시킬지 고민하다 직원의 추천을 받아 기본적인 메뉴인 대구튀김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런던 물가는 비싼 걸로 악명이 높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체감하니 무척 비쌌다. 기본 메뉴에 음료도 시키지 않았지만 원화로 18,000원이 나왔다. 음식 맛도 굉장히 평범했다. 100점 만점에 60점 정도로 맛없지도 않고, 그렇다고 맛있지도 않은 무난한 맛 그 자체였다. 음식의 특별한 점을 꼽자면 감자튀김 양이 무척 많았다는 점 정도다. 경험적으로는 특별했다. 런던에서 처음 먹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식사를 마친 뒤 런던브리지로 향했다. 숙소에서 체크아웃하기 전 런던 시내를 같이 여행할 동행을 런던브리지 앞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런던브리지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런던브리지에서 유명한 스팟 중 하나인 잔디밭에서 동행을 만났다. 동행은 대전에서 헬스트레이너로 일을 하다가 유럽으로 2주간 여행을 온 나와 동갑인 친구였다. 심지어 생일도 이틀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런던브리지 앞에서 동갑내기 친구와 한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고, 그날 하루종일 런던 시내를 같이 여행했다. 그날의 여행 중 가장 특별했던 경험은 런던아이와 빅벤이 보이는 다리 위에서의 순간이었다.


이른 저녁 무렵, 런던아이 앞에서 길거리 공연을 보며 벤치에 앉아있었다. 노랫소리와 함께 런던아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친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대화 주제 속 '우연'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주도에서 경험했던 우연한 순간들을 이야기하며, 행복함은 우연으로부터 크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다른 곳을 구경 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이동했다. 다리를 건너던 중 어떤 남성이 바이올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다 뒤로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에 잠깐 구경하고 가자며 친구를 불러 세웠다. 그 공연은 말 그대로 황홀했다. 감미로운 바이올린 소리와 영화배우 브래들리쿠퍼를 닮은 연주자, 연주자 뒤로 보이는 런던아이와 빅벤, 저 멀리 보이는 런던 브리지. 정말 황홀한 순간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친구와 나는 서로 한껏 흥분된 채 이야기했다. '우리가 그냥 지나쳤다면?, 네가 런던아이 앞에서 다른 데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만약 5분만 더 우리가 일찍 움직였다면?' 등등 앞선 우리의 선택 중 어느 하나라도 달랐다면 이 황홀한 경험은 하지 못했을 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2022 런던 국제 영화제에서 우연히 본 틸다 스윈튼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서로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향하는 어느 계단을 올라가던 중 옆으로 포토월이 있는 행사장이 보였다. 그 포토월은 TV에서 보던 연예인들이 서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포토월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단 위에서 잠시 기다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정말로 연예인이 등장했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의 하얀 마녀, [어벤저스]의 에인션트 원 역할을 맡은 "틸다 스윈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66회 런던 국제 영화제의 현장이었다. 우연히 마주쳐 더 신기했다.


앞서 말한 순간들 외에도 우연이 많았던 런던 여행이었다. 영국 여행을 마치고 스위스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지난 여행에 대해 되돌아보았다. 유럽 여행을 하기 전에도 여러 국가에서 여행을 했었는데 그다지 큰 기억으로 남지 않았었다. 심한 경우에는 '아 맞아. 거기 가본 적 있었지?!' 하는 여행도 있다. 과거의 여행들과 런던 여행은 뭐가 달랐길래 하나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경험으로, 다른 하나는 유달리 특별했던 경험으로 남을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의 끝은 '우연'과 '기대'로 귀결되었다.


과거의 여행들은 대부분 촘촘한 계획 안에서 이루어졌다. 계획을 하다 보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경험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예상은 기대를 높인다. 어떤 경험 A에 대해 계획을 하는 것을 가정해 보자. A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에 어떻게 가는지 알아본다. A를 경험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금액을 확인한다. A를 경험했던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확인한다. 금액, 후기, 위치 등 여러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만족스러운 경험이 될 것이라고 예상될 때 예약(결제)한다. 그리고 A를 직접 경험한다. A가 어떻게 진행될지 계획하면서 사전에 전부 파악했다. 실제로 경험해 본 결과 어느 정도 만족감이 든다. 이를 수치화해보자. A를 계획하며 예상한 기대치가 30이라고 할 때 실제 만족도가 30인 경우 체감되는 만족도는 0이다. 딱 기대한 만큼의 경험이라 그리 특별하지 않다. 반면, A를 우연히 경험했다면 기대는 0이니 체감 만족도는 30이다. 실제로 경험하면서 얻는 만족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된다. 만약 실제 만족도가 30 미만이라면? 계획한 상황에서는 체감 만족도는 마이너스가 된다.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생각보다 별로네". 그런  순간은 행복하기 어렵다.


여행에서 계획적인 것이 좋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대부분 처음 가는 여행지에서의 경험은 매 순간 새롭다. 새롭기 때문에 그 순간들은 모두 특별해질 수 있다. 하지만, 계획을 하다 보면 여행지에서의 일상적인 순간 보다 랜드마크, 유명 투어 등 임팩트 있는 순간들을 더 크게 생각하게 된다. 즉, 여행지에서의 일상적인 순간들은 뒤로 밀린다.


나의 과거 여행들은 계획적이었기 때문에 체감 만족도가 낮고, 일상적인 순간들에서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여행에서는 생각보다 별로인 경험, 일상에서 특별한 순간들이 없었던 거 같다. 반면, 런던에서는 정처 없이 걸어 다니는 순간, 런던아이 앞에서 멍 때리며 앉아 길거리 공연을 본 순간, 프림로즈힐에서 잔디밭 위에 앉아 피자를 먹었던 순간 등 그런 일상적인 순간들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할 때 최대한 계획하지 않는다. 항공권, 숙소 정도만 예약을 하고 정보는 기본적인 것만 찾아보고 세부적인 정보, 후기 등은 최대한 배제한다. 무의식적으로 기대하지 않도록 막는다.


 여행유튜버 [곽튜브]의 영상 중 다비치와 함께 한 영상에서 곽튜브는 강민경 씨에게 말한다.


"그거 다 찾아보시면 가서 보는 맛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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