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미언 셔젤, 라라랜드
<라라랜드>를 인생영화로 꼽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다. 그리고 나도 <라라랜드>를 인생영화로 꼽는 그 수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이다.
<라라랜드>는 너무나도 유명한 OST, 그리고 예쁜 색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완성도로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의 사랑이 특별해서 작년 연말시즌에는 <라라랜드>의 음악을 총괄한 저스틴 허위츠가 한국에 방문해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는 콘서트를 진행하기도 했었다.
어떤 영화들은 처음 봤을 때보다 두 번째, 세 번째 볼수록 러닝타임이 짧아지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극 중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때로는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며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면서 관점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여러 영화들이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 <라라랜드>는 그런 영화였다.
보랏빛 밤 반짝이는 별 아래서 흥겹게 탭댄스를 추는 남녀의 모습을 익히 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긴 시간 동안 패러디되고 회자되며 가히 멜로영화, 뮤지컬 영화 하면 베스트로 꼽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돌이켜 보자면 이들의 사랑의 시작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이 따분해서 자꾸 새로운 남자가 아른거렸던 여자는 현재로서는 아무런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남자에게 이끌려 원래의 남자친구와의 중요한 식사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야말로 '환승이별'
영화 초장부터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둘이 죽고 못 사는 영원한 사랑을 그리거나, 같이 있었을 때만큼은 빛났던 유일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서 다루고자 하는 사랑이 환승연애로 시작해 버리는 과감한 수를 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러나 관객들은 이내 모든 것을 망각하고 그들이 추는 춤에, 그들이 부르는 노래에 매료된다.
그래, 시작이 어찌 됐건 그 과정만은 찬란하리라. 이 둘의 사랑을 응원하며 끊임없이 나오는 인정사정없이 좋은 사운드트랙에 몸을 맡긴다.
이게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만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이 사람과의 사랑이기에, 시작이 어찌 됐든 일단은 즐긴다. 걱정은 나중에 한다.
여자는 배우를, 남자는 정통 재즈 뮤지션을 꿈꾼다. 그렇게 서로의 꿈을 서포트하며 서로가 가지고 있는 꿈에 대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즈음, 남자는 본인이 하려고 하는 음악과는 다른 상업적인 길로 접어들게 되고 그로 인해 명예와 부를 얻기 시작하지만 여자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
네가 그렇게 자부심을 가져하던 정통 음악은 어디 갔냐, 네가 하고 싶은 것이 결국 그거였냐, 라며.
바쁜 와중에도 전국 투어를 마치고 여자의 집에 몰래 잠입해 서프라이즈를 하려던 그에게 시비를 거는 여자와의 싸움이 나오는 씬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세상 모든 커플들의 싸움이 그렇다. 말 한마디, 어쩌면 어투, ㅋ을 몇 개를 썼냐는 둥 별 시답지 않은 걸로부터 큰 싸움으로 번져버린다. 여자의 개인적인 일들과 겹쳐 남자의 성공이 여자에게는 그렇게 영광스럽지 않다. 눈을 흘기고, 공격한다.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고 했었는데, 남자가 만들고 있던 음식은 오븐에서 타버린다. 바로 몇 분 전에 불렀던 명곡 <City of Stars>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다.
가슴 저리도록 아픈 사랑을 해보았는가? 아마 한 번쯤은 다들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그러나 <라라랜드>는 가슴 저리도록 아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랑이라는 것도 현실이기에 각자가 처해진 현실에 맞게 감정이 움직이게 되고, 그 감정이 서로 맞물려 결국은 서로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사랑의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의 이별씬은 그래서 그렇게 가볍게 다뤄졌다.
서로가 평상시에 하던 농담을 그대로 주고받으며 그냥 '내일 몇 시에 만나자' 같은 어조로 가볍게 서로 각자의 길을 가자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울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싱겁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무게감을 싣는 것에 대해 모든 사랑이 무거운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무게가 사랑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말하고 싶다.
<라라랜드>의 주인공이 서로 주변을 살피지 않고 단순히 사람만이 좋아 만나서 사랑하게 된 이들이 결국 현실의 이유로 헤어지게 됐듯이. 그러나 그들이 아주 먼 미래에 서로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고받았던 눈빛에서 느껴졌던 감정이 영화 속 그 어떤 장면의 눈빛보다 강하고 슬펐듯이. 헤어짐이 슬프지 않았던 사랑이 나에게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내 사랑이었을 수도 있다. 그게 참 슬프고, 예측 불가능하다.
주변에 국가를 넘어서 현실을 극복해 사랑에 성공한 부부가 있다. 그 부부를 보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이 '존경심'이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으며 결국은 함께 하게 된 사람들.
어쩌면 그들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이대로 마음에 묻어두는 게 나한테도 편하고 그 사람한테도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그것을 극복한 것이다.
<라라랜드>는 그런 특별한 사랑을 빼고 보편적인 사람의 감정을 말하고 있다.
아름다울 때에는 아름답게, 장난스러울 때는 또 장난스럽게. 그리고 서로보다 중요한 것이 생겨 상대방의 손을 놓아야 하는 장면에서는 사람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상황에 집중하며 당사자들이 슬픔을 느끼지 않듯이 관객에게도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게 더 나는 슬프다. 결국 다른 사람 곁에서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고, 떠올리며, 진한 후회, 그때 이 사람을 선택했다면 지금 나는, 하는 생각.
왜 그리워할 사람과 그때 함께하지 못했는지, 그래서 지금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파고드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냥 그들이 그때 그랬듯 현실에 순응하며 지그시 진한 눈빛을 보낼 뿐인 둘.
그래서 나에게는 <라라랜드>가 내 인생 최고의 멜로영화이다. 어쩌면 내가 느꼈던 감정이고, 앞으로도 겪을 수 있는 일들이기에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지는 스릴러 영화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 안타까워했음에도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내 자신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히려 더 말해야겠다. 이 사람이 아니라 다른 더 중요한 무언가가 생겼을 때 어쩌면 단지 내가 나약해서 내 사람을 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정녕 더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일인건지 말이다.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때로는 가슴이 부서지도록 아플 때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덜 느끼면서 살고 싶다.
인생 자체를 되돌려 그 사람과 만났다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내 자신은, 상상만 해도 큰 것을 잃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