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블롬캠프, 디스트릭트 9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SF영화는 많고 많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외계인은 저 먼 우주에서 친히 이 지구까지 방문했기에 인간세계보다 더 발전되고 고도화된 세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외계인이란 것은 신비로운 존재이며, 우리는 그들에게 존재가 발각되어 버리면 금세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들이 우리보다 미개한 존재라면 어떨까. 역발상으로 비튼 설정이 특이한 영화 '디스트릭트 9'이 그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정체불명의 우주선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상공에 머무른다. 인간들은 관찰도 해보고 공격도 해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결국 가만 둘 수 없어 내부로 쳐들어가보도록 한다.
사실은 그 우주선은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온 게 아닌 불시착한 것이었다. 우주선 속 많은 외계인들은 아사 직전이었다. 그런 그들을 인간들은 '디스트릭트 9'이라는 구역을 만들어 임시 수용하도록 한다. 그러나 해결책을 찾지 못해 그 수용기간은 30년 가까이 이어지고, 지능이 낮아 멋대로 행동하는 그들을 감당할 수 없어 디스트릭트 9을 강제로 철거하기로 결정한다.
이 외계인들은 그들만의 언어가 있고, 지능도 꽤 높은 편이다. 다만 인간세상의 룰, 그러니까 도덕에 대해서는 학습하지 못해 인간들에게 미개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오히려 물리적인 힘은 그들이 더 강력하다.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인간을 찢어 발길 수 있다. 정신적으로 지배 당해 조절할 뿐이다.
익숙한 이야기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세상은 시작부터 정복과 지배가 함께했다. 대한민국도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게 지배당했으니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형태와 핑계는 다양했지만 우리들은 그래왔고, 그래야만 했다. 먼저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당하는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영화 속 외계인을 대한 지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간들이 만든 룰로 먼저 지배해야 두려움이 관리된다. 종족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법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외계인들이 쓰고 있는 무기들은 쓸만하다. 인간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그러나 외계인만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생체연구가 진행된다. 그래도 된다. 왜냐하면 그 무기들로 인간들이 공격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무기들도 인간들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던 와중 철거 프로젝트의 리딩을 맡고 있는 주인공이 외계 생명체에게 감염당해 외계인으로 점점 바뀌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행동에는 모두 ‘인간을 위함‘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그것은 꽤나 타당했다. 그러나 ’외계인으로 변해가는 인간‘ 이라는 존재가 나타남으로써 그것에 대한 타당성이 억지 합리화로 변해간다.
그가 이미 외계인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정부의 언론플레이, 그의 가족을 향한 거짓말. 모든 작업들 앞에서 그는 무기력하다. 결국 그 차별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이었던 것이다.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벌어지는 무자비한 연구에서 그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그는 인간세상에서 외계인으로 분류되어 버렸다.
관객은 인간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닌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모든 과정들이 우리에게 직, 간접적으로 익숙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인간은 원래부터 잔혹한 존재였으며 제도로서 그 잔혹성이 관리되어 왔을 뿐인 것일까. 단지 일부의 인간들만이 잔혹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보기에는 이미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역사적으로 자행된 일이기에 부정할 여지가 없다.
약자를 응원하게 되는 본능, 그러나 약자를 지배하려는 현실. 이중성은 존재한다. 핑계는 불가능하다.
다행인 것은 영화와는 다르게 우리 스스로 자정 하려는 노력이 현실세계에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각자의 의견을 목소리 높인다는 것은 이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염세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은 다수의 의견대로 흘러가는 것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은 합리적인 의견을 내는 세상이기에 오늘도 나는 안전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잔혹성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디스트릭트 9’은 영화 그 자체로서의 존재로 끝나지 않고 왜 우리가 약자의 편도 고려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미 외계인으로 모두 변해버린 도망자 주인공이 아내를 그리워하며 홀로 만든 쓰레기 꽃.
그의 외형은 외계인으로 모두 변해버렸으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은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인류가 존재해 온 이래로 핍박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처럼 말이다.
관점을 새롭게 만들어 줬던 영화 디스트릭트 9,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감성이 중요시되는 순간에 떠오르는 나의 인생영화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