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 퍼니게임
관객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낸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는 재밌었다, 재미없었다 혹은 추천한다 추천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며 평가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많은 감독들과 제작사는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만든다. 그런 영화들이 팔리고, 잘된다. 속편이 제작되고 출연한 배우들은 유명세를 타서 또 다른 대작 영화에 출연한다. 그게 영화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게임>을 가장 접한 건 미국 리메이크 작이 처음이었다. 이 영화는 1997년 오스트리아에서 개봉되었으며,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감독의 말에 의하면 '자막을 읽기 싫어하는 미국인들을 위해' <퍼니게임> 개봉 10주년 기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판 <퍼니게임>을 보고 원작을 보면 내용, 구도, 대사를 포함해 그 모든 것이 거의 동일하다. 배우와 언어만 미국 버전으로 바뀐 셈. 그러나 내가 이 글에 미국판의 포스터를 쓴 이유는, 적어도 나에게는 미국판이 더 매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영화가 공개되었을 시 역겹고 더러운 영화, 짜증이 난다, 화가 난다 같은 평들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정확하게 내가 영화를 봤을 때의 감정과 일치한다.
처음 봤을 때 너무 힘들어 놓친 부분이 많은 것 같아 두 번, 세 번 보고 나니 감독이 이 영화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조금은 알겠더라. 어쩌면 감독은 관객을 조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스릴러 영화를 표방한 <퍼니게임>은 초반이 지나면서 기이한 행보를 보여준다. 한 가족이 별장에 놀러 온 상황에서 달걀을 얻으러 온 정체불명의 남성 둘. 이 남성들은 고의인지 실수인지 달걀을 깨트리고 달걀이 깨져서 가져갈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 달걀을 달라고 한다. 그 와중에 유일한 통신수단인 전화기를 물에 빠트리며 민폐를 지속하다가 결국 폭력을 일삼으며 가족들을 공포로 밀어 넣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영화에서는 위기에 처한 가족들이 범죄자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한다. 퍼니게임>의 그 방법들은 손에 땀을 쥐지만 이상하리만큼 성공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이들은 아이를 첫 희생양으로 삼는다.
영화 안의 이야기에 심취한 관객들은 저 가족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아이에게 총은 쏴졌고, 아이는 사망했다. 이게 진짜가 맞나, 싶으면서 화가 난다. 흡사 범죄자 두 명이 가족을 괴롭히는 기승전결 없는 동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더 약 오르는 부분은, 영화 속 범죄자들이 스크린 밖의 나를 보고 웃는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이 범죄자가 나에게 '너도 한편이잖아'라고 말하는 듯. 의도적으로 스크린 내의 이야기를 별개로 진행시키는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퍼니게임>은 영화를 보고 있던 나를 공범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말릴 수 없다. 그냥 지켜보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일이다.
이유 없는,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는 가족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순발력 있게 총을 낚아챈 남편은 범죄자 한 명을 향해 총을 갈긴다. 그는 총을 맞고 죽는다. 와. 이제 드디어 가족들이 풀려나는 것일까. 남은 범죄자 한 명은 허겁지겁 뭔가를 찾는다. 리모컨을 집어 들고, 버튼을 누른다. 화면이 되감기 된다. 남편이 총을 집기 직전으로.
다시 남편이 총을 집으려 움직인다. 이번엔 어림없다. 총을 뺏기고 죽는다.
탄식이 나온다.
기발하고, 짜증이 난다.
그제야 깨닫는다. 이 가족은 그냥 죽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구나. 영화 속 범죄자들은 이게 영화라는 걸 알고 있구나. 그리고 나는 그걸 보고 있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단 한 장면도 보여주지 않는 악랄한 감독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스릴러와 공포를 찾는 나는 왜 이 가족들이 범죄자들로부터 도망치길 바랐던 것일까? 내가 이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하면서 보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온 가족이 몰살당하기 전 이 가족들의 고통을 보면서 '이건 영화니까'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나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감독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스크린'이라는 바운더리를 벗어나면서까지 모두 보여주었고, 나는 그걸 보면서 허탈해하고 답답해했을 뿐이다. 내가 이 영화를 평가하려고 앉았는데 그것이 철저하게 비웃음 당한 느낌이었다. 감독이 바란 것은 그것이었을까.
누군가에게 훈수질을 하다가 뺨 한대를 시원하게 얻어맞은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다. 많은 영화를 봐 왔다고 자부해 왔던 나에게, 나는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내가 의도한 대로 너는 지금 화가 나지?라고 말하고 있는 감독에게 역으로 존경심마저 들었다.
맞다. 생각해 보면 내가 뭐라고 영화를 평가하고 있었을까 싶다. <퍼니게임> 속 가족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뭘 근거로 이 가족들이 살아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싶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조롱당했다. 그것이 기분 좋았다.
지금까지 영화 앞에서 거만했던 나에게 날리는 통쾌한 펀치, 그래서 <퍼니게임>은 나에게 있어 인생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