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야지. 네가 선생인데.
누군가 1년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꼽으라고 물어보면 늘 3월에서 5월까지를 이야기한다.
이때의 괴로움이 1년의 괴로움 모두를 합한 것의 7-80프로 정도의 지분을 차지하니 말이다.
이 때는 정말이지 잠도 오지 않고,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였다.
때는 바야흐로 3월 말,
밀려오는 업무와 난장판인 아이들.. 그리고 거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는
매일 하루하루가 힘에 부쳤고 고단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 내게 원감님의 히스테릭한 업무 피드백은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의 발파제였다. 안 그래도 힘든 것을 애써 참고 좋은 생각으로 다니려는 나에게
원감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늘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 같은 느낌이었다.
원감님은 지독한 기분파로 어떨 때는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기분이 안 좋은 대다수의 날 동안엔 별 일 아닌 작은 실수에도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시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점점 작아져만 가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같은 동료 교사들도 나를 보며 동정을 하기 시작했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날 위해 대신 그녀의 흉을 봐주곤 했다.
그렇게 3월의 마지막을 달려가던 어느 생일파티 날,
처음 맞는 생일파티에 나는 정신없이 이리 뛰며 저리 뛰며 아이들의 사진을 찍고 줄을 세워 선물 증정식
을 하고 있었고(내가 다녔던 유치원은 생일을 맞은 유아를 위해 같은 반 아이들이 하나씩 작은 선물을 준비해 왔다.), 여느 때처럼 별 것 아닌 일로 심기가 건드려진 원감님께서는 한껏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나에게 한 소리를 하셨다.
왜 힘든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하지 않은가.
하필이면 그날 일이 고되었고, 하필이면 원감님의 심기마저 좋지 않았으며, 하필 그때 즈음 몸상태는 최악으로 치닫았고(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통증이 심해 주말마다 물리치료를 받던 시기였다), 하필 그날은 사랑하는 남자친구의 생일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채 숨을 돌리며 남자친구와 함께 들어가 있는 단톡방의 알림을 눌러보았을 때,
나보다 먼저 생일을 축하해 준 수많은 이들의 축하글들을 보며
나는, 서러움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이 흘려버렸다.
잠깐 짬을 내어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해 주지도 못했다는 미안함,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하루를 간신히 살아내는 것에 급급했던 내 현실,
그에 따른 절망감과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 회의감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한 데 어우러져 내 감정을 폭발하게 만들었고,
나는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야만 했다.
내가 가장 축하해주고 싶었던 사람의 생일에
나는 또다시 가장 최악의 하루를 버텨내야 했다.
스물일곱 그 해는,
가장 반짝거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부푼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장 최악이라 생각되는 하루들이 매일같이 새로운 얼굴로 나를 반기었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