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컨디션이 예전 같지 않았다. 미뤘던 건강검진도 할 겸 병원예약을 잡았다. 검진을 며칠 앞둔 시점 걱정이 밀려왔다. '혹시'와 '만약'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불안은 채찍을 휘두르고 두려움은 멱살을 조여왔다.
오늘이 마지막날이라면, 주어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끝은 어떤 마음으로 준비해야 하나.
유서는 죽음이 닥쳤을 때 남기는 기록이 아니다. 행복한 순간, 평안한 순간 언제라도 쓸 수 있는 편지다. 천상병시인이 읊었던 '이 세상 소풍'은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다. 마지막 편지는 지금 이 순간 써야 한다! 남겨진 가족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을 적기 시작했다. 결국, 혼자서 세상 끝까지 걸어갔다가 촉촉해져 돌아왔다.(청승맞게)
'마지막' 글자 앞뒤로 'ㅁ'이 한 개씩 달려 있다. 시작과 끝에 네모난 문이 하나씩 달려 있는 것처럼.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문을 열고 세상에 들어왔다가 태초 살던 곳으로 돌아나가는 문이다.'
끝이란 녀석을 앉히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에 없이 평안하고 너그러워졌다. 바늘구멍보다 좁았던 마음씀씀이가 우주라도 품은 듯 관대해졌다.
검진결과는 대체로 괜찮았다. 옹송거리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27시간 장을 비운 끝에 비로소 죽 한 그릇과 마주했다. 무엇이든 비우고 비워야 반갑게 맞이할 수 있구나. 채우기만 급급했던 날을 지나 비우기를 실천한 날, 비로소 가볍고 산뜻한 나를 만났다.
단출한 음식은 진수성찬보다 풍성하고 산해진미보다 풍요로웠다. 따뜻한 죽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장기 하나하나에게 안부를 묻는 느낌이다. 포근한 온기가 세상 끝에 선 자를 안아준다. 때로는 말보다 소박한 음식 한 그릇이 위로가 된다.
새벽을 두른 고요는
꿈을 핥는 뒷모습
물속으로 뛰어든 불씨
타닥 타들어가는 빗방울
멀건 어둠이 또렷해지는 시간
침묵을 더듬는 벽과
잠들어버린 꿈과
빛바랜 꽃잎과
길목의 서성임을 이야기할 시간
아득한 멀리
개는 잠들지 않았다.
낮을 기억하는 송곳니
응시하는 까만 우주
새벽은
귀로 보는 시간
죽음은 가소롭고
生은 한낱 돌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