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첫 번째 - ‘전업주부’
"OOO 회사입니다. 부득이하게 귀하를 채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이제야 엄마 품을 조금씩 떠나가듯 제 할 일 스스로 하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 취업을 해도 되겠구나.'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다. 미열람이 수두룩, 그나마 열람하여 면접까지 본 회사에서는 오늘처럼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기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다니면 너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넣었지만 취업이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속상함, 서운함, 슬픔보다는, 앞으로 나는 경력자로 계속 취업을 준비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공부를 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이었다.
아이 키우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값진 경험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다들 이야기한다. 나도 동병상련의 엄마들이 하소연하면 그렇게 위로했다. 육아가 제일 어려운 경험인데 잘 해내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노력한 만큼 아이들은 잘 자랄 것이라고, 유형가치가 아닌 무형가치에 집중하는 시간이라고. 그들에게 이야기하면서도 그 위로를 내게 각인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솔직히 그렇게 위로하면서도 나조차도 혼란스러웠으니까.
아이는 밝게 잘 자라는 반면 엄마인 나는 깊이 침잠했다. 앞으로 뭘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가지, 얼마나 돈을 벌어야 우리 부부의 노후는 안정이 되지, 어떻게 살아가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형과 무형가치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지,라는 여러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를 보는 게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며 '돈'을 생각하게 된다. 맞벌이였다면 더 많이 저축했을 텐데, 외식도 부담 없이 했을 텐데.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비용을 생각 안 할 수 없고, 매월 빠져나가는 생활비에 대해 남편에게 요구하기가 아직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표 영어, 한글, 독서, 수학 이런 것에 엄마들이 스스로 더 갈아 넣는 이유는, 아이와 엄마의 성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후도 불안하고 물가도 계속 치솟고 경제도 불안정하고, 이런 세상에서 엄마들은 우리 가족들 미래가 '돈' 때문에 휘청거리지 않도록 본인 스스로를 더 희생하며 아이를 가르치려 하는 것일 테니까.
불합격 통보를 받고 더욱 짙어진 막막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이른 오후에 돌린 빨래가 다 되었다는 세탁기 신호음이 울렸다. 바구니에 세탁물을 모두 담았다. 속옷과 겉옷, 양말이 뒤섞인 빨래를 보니 마치 지금의 뒤엉킨 내 마음 같았다. 바구니를 들고 거실로 들어갔다. 빨랫대를 폈다. 탁, 탁, 좌우 균형을 이룬 빨랫대. 회계에도 대차평균의 원리가 있고 빨랫대도 좌우 균형을 이루는데, 왜 내 인생은 이것만도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계속 막막함을 느끼며 멍 때리는 내 곁으로 어느새 아이가 다가와 이야기한다.
"엄마, 내가 도와줄게."
아이가 작은 손으로 빨래를 턴다. 엄마만큼 야무지게 털지는 못하지만 어설프게라도 도와주려는 아이의 마음을 훔쳐보며 어느새 나도 미소를 짓는다. 아이의 도움 덕분에 금방 널게 된 빨래들. 처음에 빨래도 세탁기 속에서 서로 뒤엉키며 돌아갔을 것이다. 일정시간이 지나 깨끗하게 세탁이 되었을 것이고, 외부로 나와서야 가지런히 놓이며 정돈이 되었을 것이다. 내 마음도 아마 그러한 과정에 있지 않을까. 머리로만 이해하며 말하는 '육아의 가치'에 대해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 세상의 위로를, 일정시간이 지나 반짝반짝 잘 성장해 온 아이를 본다면 마음으로 느끼게 될 날이 올까.
균형, 생각해 보니 유형가치의 균형은 모르지만 무형가치의 균형은 이루어져 가는 것도 같다. 전업주부로 아이를 살뜰히 보살핀 보답으로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살피고 도와주니까. 비록 경력단절로 인해 취업이 쉽지 않아 경력 불균형이 생길지언정, 아이는 내가 해준만큼 보답한다. 아직 완벽한 정답은 찾지 못했지만 차차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일상을 맞이할수록 내 삶은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깊어질 것이다. 열심히 삶을 주무르고 세탁하며 스스로 정답을 찾기까지 이 과정을 견뎌내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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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반응이 괜찮았으나 그 이후의 글이 떠오르지 않았다.
취업이 계속 안된다면 기본적으로 글이 우울모드일 것이다. 계속 그 감정을 걸러내려고 해도 쉽지 않을 거고. 그러다 문득 떠오른 소재 하나. 난 전업주부여도 돈을 벌고 있다는 신선한 소재를! 이것도 다음 장에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