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을 얘기하기에 앞서 그 전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고작 두 달 전임에도 전생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2025년 5월. 바야흐로 내 인생에서 가장 편안했던 시기였다.
2월에 결혼해 살림을 합치며 으르렁 기를 세우고 싸우던 우리는 어느덧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집안일을 포함한 온갖 곳에서 서로의 영역이 얼추 정해졌다. 각자 잘하는 걸 하고 못 하는 건 상대방에 따랐다. 존중과 배려, 그리고 적당한 포기가 사이좋은 부부의 미덕임을 깨닫고 돌아가며 하나씩 양보했다. 어떤 건 내려놓고 어떤 건 맞춰가며 낭만을 현실로 잘 다듬어갔다.
남편과의 다툼이 잦아들고 부부 관계가 평온해지자 새삼 모든 게 감사했다. 우리는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울-대전 장거리 연애를 했는데, 같이 사니까 뭐든지 편하고 쉬웠다. 더 이상 기차 취소표 구하겠다고 치열하게 새로고침을 누르거나, 기차역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애써 헤어질 필요가 없었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마다 느꼈던 헛헛함과 공허함도 이제 끝이었다. 몇 시간 통화하느라 뜨거워진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 과거와 다르게 이젠 언제고 따뜻한 품을 느끼며 대화할 수 있었다. 한적한 평일 데이트도, 퇴근 후 맥주 한 잔도 감격스러웠다.
결혼하고 바뀐 지역에서의 삶도 만족스러웠다. 서울에서 혼자 살며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결혼하고 대전으로 내려왔다. 대전은 남편의 근무지이자 나의 고향이다. 2년만 살다가 남편이 직장을 옮길 수 있을 때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 했는데, 생각보다 귀향 생활이 제법 잘 맞았다. 없는 야망까지 쥐어 짜내 사람을 몰아치는 서울과 달리 대전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서울에서 나는 분명 궁핍하고 어려웠는데 대전에선 같은 돈으로도 꽤 많은 걸 누릴 수 있었다. 지하철과 원룸 생활을 전전하다 구축 아파트에 살며 조그만 차를 끌고 다니니 비로소 숨이 트였다.
관계에서의 안정과 물질적인 만족이 해결되자 맘 놓고 딴짓할 여유가 생겼다. 교사라는 본업은 밥벌이로 남겨둔 채 나는 본격적으로 부업에 매진했다. 블로그, 브런치, 그림일기, 대전 로컬매거진, 팟캐스트 등 나만의 콘텐츠를 원 없이 만들었다. 대학 입시와 임용고시, 공무원이라는 틀에 갇혀 억눌렸던 자아를 맘껏 펼쳤다. 남들 10대, 20대에 하는 걸 뒤늦게 해보는 게 아쉬웠지만 이제라도 하는 게 다행이었다. 돈이 안돼도 나한텐 그게 낙이고 직업이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수익화가 가능할 거란 기대도 품었다. 꾸준히 하면 하나는 잘될 거란 심산으로.
작년에 했던 독립 출판도 주제를 바꿔 다시 내보기로 했다. 이번엔 대안적 육아에 대한 인터뷰집을 만들고 싶었다. 마침 서울에서 종종 가던 작업실 사장님께서 출판사를 만드신다며 내 책의 기획안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괜찮다면 포토그래퍼와 디자이너를 연결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간만에 엄청 설렜다. 귀인을 만난 기분, 이 기회는 꼭 잡아야겠단 생각에 의지가 충만해졌다. 학교 일이 힘들어도 이렇게 살면 괜찮을 듯싶었다. 퇴근 후에 자아실현 하면 되지. 돈 생각 안하고 하고싶은 걸 할 수 있으니 교직도 새롭게 보였다. 이렇게 2년 정도 살다 보면 이직의 길이 열릴 수도 있고.
일과 가정, 자아실현의 삼박자가 딱딱 맞는 호시절을 맞이하니 집에서 조용히 책 읽고 남편이랑 건강하게 식사하는 소소한 일상마저 맘에 들었다. 항상 예민하고 불만 많은 내가 이렇게 안온한 건 처음이었다. 괴로웠던 10대와 외로웠던 20대를 지나 이제 비로소 행복해지나 싶었다. 이 행복을 최대한 길게 가져가고 싶었다. 아이는 3년쯤 뒤에 낳거나 안 낳아도 상관없었다. 남편과의 삶으로 충분했다. 당분간은 굳이 새로운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런. 데.
한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날벼락 같은 일이 찾아왔다. 어린 아이가 열심히 쌓아올린 모래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평범한 내 일상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