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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21. 2024

12. 종교적인 인간이 거듭남의 계기를 맞았을 때

  – 쿠엔틴 타란티노, 〈펄프 픽션〉

12. 종교적인 인간이 거듭남의 계기를 맞았을 때 – 쿠엔틴 타란티노, 〈펄프 픽션〉(1994)

의미 있는 견강부회, 또는 창의적인 오독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종교적인 주제를 표방하는 영화들을 제외한다면, 수적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렇지 않은 다른 영화들을 억지로 종교라는 필터를 통해 들여다보고 하는 발언은 아무래도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전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의미는 또 아닙니다. 때로는 견강부회가 뜻밖의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주기도 하니까요. 따라서 이 ‘의미 있는 견강부회’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창의적인 오독(誤讀)’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시에 이는 우리네 삶이 그만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여 ‘다른’ 필터를 통해 들여다볼 때 그 다양한 요소들 각각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제 또한 얼마든지 다양한 갈래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이 어떤 세계관, 어떤 시각을 지니고 있느냐, 혹은 그 세계관, 또는 시각을 얼마나 강한 의지로 관철하고자 하느냐가 관건일 뿐이겠지요.

   심지어는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석하려고 드는 태도가 영화 속 깊이 감추어진 새로운 의미를 캐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편의 구실까지도 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펄프 픽션〉은 바로 이런 견강부회, 또는 오독이 해석의 한 갈래나 방도로서 유의미하게 적용되는 드문 사례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갱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제가 〈펄프 픽션〉을 종교의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는 착상을 얻은 것은 이 영화가 1994년, 그러니까 지금(2024년)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의 칸 영화제에서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의 〈레드〉를 제치고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뒤,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개봉 날 극장으로 달려가 조조 회차로 처음 보았을 때부터였습니다.

   영화는 어떤 식당에서 한 쌍의 남녀가 아침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흡사 우디 앨런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연상시킬 만큼 쉴 새 없이 부산스럽게 대사를 쏟아놓는 이 남녀는 마침내 그 식당을 털기로 의기투합한 뒤 지체 없이 총을 뽑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섭니다.

   이어 타이틀 자막이 뜨고 나면 방금 장례식장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한 듯 말쑥한 검은색 정장 차림의 두 사내가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대화를 나누는, 전혀 다른 장면이 이어집니다.

   바로 쥴스(사무엘 L. 잭슨)와 빈센트(존 트라볼타)입니다.

   이들 역시 영화의 주제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시시껄렁한 내용의 대화를 끝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습니다.

   파리에서는 햄버거집에서 맥주를 살 수 있다든가, 네덜란드에서는 프렌치프라이에 케첩 대신 마요네즈를 바른다든가, 하는 따위 이야기가 이 영화의 내용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둘은 자기들의 대화에 시종일관 진지합니다.

   그래서 어딘가에 당도한 그들이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고 총 한 자루씩을 꺼내어 소지하는 대목에서도 지금 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헷갈리기만 합니다.

   그들은 계속 ‘나불거립니다’. 나중에는 거의 논쟁의 수준까지 근접하지요.

   물론 이들은 갱단의 일원이며, 보스의 명령으로 그들 조직에 해를 끼친 어떤 일당을 손봐주러 온 참입니다.

   하지만 관객은 둘의 태도에서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을 코앞에 둔 사람 특유의 긴장감 따위는 도무지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렇습니다. 감독은 바야흐로 그들의 삶 또한 여느 생활인들처럼 일상성의 그물코로 촘촘히 짜여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곧, 이런 임무는 그들에게 하등 특별하지 않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마약 밀거래 과정에서 보스를 속인 일당을 처단하기 직전 느닷없이 쥴스가 성경 구절을 읊조립니다. 장난기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장엄한 어조로 무시무시하게요.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니,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니라.”

   쥴스는 겁에 질린 상대방한테 이것이 에스겔서에 나오는 말씀이라고 친절히 가르쳐주기까지 합니다.

   내용 자체보다는, 한갓 갱인 그가 바야흐로 응징의 총질을 하려는 마당에 엉뚱하게도 성경 구절을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행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저 포스트모던한 신세대 갱스터 무비쯤으로 평가되는 이 영화를 종교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태도가 의미를 얻는 것은 이 대목에서부터입니다.     


종교적인 인간

   하지만 영화는 이내 〈펄프 픽션〉을 〈펄프 픽션〉이게 한 그 특유의 편집, 곧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한 뒤죽박죽의 편집―이런 어찌 보면 ‘난잡한’ 편집 방식은 뒤에 여러 영화가 ‘레퍼런스’ 합니다―으로 스토리 자체를 극히 혼란스럽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관객은 영화가 애초부터 고의로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부터 비로소 차츰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탓에 저는 ‘엉망이 되어 있는’ 이야기 구조를 옳게 꿰어 맞추고자 꼼꼼하게 앞뒤 인과관계를 따져보아야만 했고, 그러느라 애초 제가 어떤 관점에서 이 영화를 해석하려 했던가를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이 괴상하기 짝이 없는 편집의 압도적인 혼란스러움을 수습하기까지는 시일이 조금 필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애초의 뜻은 당연히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렸고요.

   그러다 그 얼마 뒤에 우연히도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놀랐지요. 잊은 줄로만 알았는데, 제 머릿속에서는 어느덧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리가 종교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이내 확인할 수 있었지요.

   무엇보다도 쥴스와 빈센트가 각기 지니고 있는 세계관의 ‘다름’과 그들의 인생행로가 과녁입니다.

   둘은 영화의 첫대목에서 논쟁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 대화란, 그 시점 이전의 언젠가 있었을, 저 보스가 제 여자의 발목을 마사지해 주었다는 이유로 어떤 사내를 창밖으로 내던진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사내는 그때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실어증에 걸렸는데, 빈센트는 남녀 간의 문제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고, 쥴스는 겨우 그 정도 사유로 사람을 내던져 벙어리로 만드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구절을 암송하는 쪽은 보스의 처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쥴스입니다.

   이는 그가 스스로는 의식 못 하고 있을지언정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이라는 암시로 읽힙니다.

   요컨대, 어떤 결정적인 계기와 맞닥뜨리기만 하면 그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변화할, 곧 ‘거듭날’ 수 있는 인물인 셈입니다.

   이런 해석이 의미로운 것은 영화의 처음과 끝에 하필이면 바로 이 거듭남의 원인과 결과에 해당하는 장면들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시간 순서로 따지면 영화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장면들인데도요.     


심판과 구원의 교차

   결정적인 계기는 이것입니다.

   쥴스가 성경 구절을 보란 듯이 암송해 보인 뒤 빈센트와 함께 ‘총질’을 하는 첫 장면의 계속되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안도하는 사이 갑자기 화장실에서 또 다른 일당 한 명이 권총을 쥔 채 득달같이 뛰쳐나오더니 쥴스와 빈센트를 겨냥하여 바로 코 앞에서 총을 난사합니다.

   그러나 그 총구를 빠져나온 총알들은 어찌 된 일인지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모조리 두 사람을 비켜 가 버리지요. 기적이라면 기가 막힌 기적이었습니다.

   덕분에 둘은 목숨을 건졌고, 총질이 서투른 예의 일당 가운데 한 명은 거꾸로 그들 손에 총알받이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제부터가 문제입니다.

   빈센트는 이것을 한갓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하고, 쥴스는 이것을 종교적인 의미에서 어떤 계시를 품은 기적이라고 해석합니다. 앞서 보였던 생각의 차이를 여기서도 고스란히 드러내는 두 사람입니다.

   이 지점에서 둘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끝까지 대립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이 태도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약에 절어 사는 빈센트는 보스의 또 다른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의의 총격에 절명하고, 시간상으로는 이보다 앞서는 상황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쥴스는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빈센트한테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변화하였음을, 곧 ‘거듭났음’을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덧붙이지요.

   이런 생활을 청산한 뒤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세상을 순례할 거라고요.

   그는 갑자기 구도자가 된 듯합니다. 엄청난 변화, 거듭남입니다.

   한데, 공교롭게도 쥴스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은 영화의 맨 앞, 그러니까 한 쌍의 남녀가 아침 식사를 하다가 느닷없이 총을 꺼내 드는 바로 그 시각, 그 식당입니다.

   여기서 그들 모두는 ‘결정적으로’ 만납니다.

   빈센트가 잠시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식사 중인 손님들을 소지한 총으로 위협하여 지갑을 빼앗아 모으던 남자가 그만 노련한 쥴스한테 덜미를 잡혀 이번에는 거꾸로 자신이 총으로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쥴스의 변화, 그의 거듭남이 야기하는 결과가 펼쳐집니다.

   여느 때 같으면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다짜고짜 방아쇠를 당겨버렸을 테지만, 이때만큼은 쥴스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한번 앞서의 성경 구절을 읊조려 보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지요.

   “전에는 이 말씀의 뜻 따위 생각하지 않았어. 그저 사람을 쏘아 죽이기 전에 습관적으로 외던 구절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오늘은 그 뜻을 되새겨보았거든. 이봐, 나는 지금 목자가 되고 싶어.”

   이윽고 쥴스는 총을 거두어들이고 그들을 고이 살려 보냅니다. 덕분에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진정으로 ‘구원’된 것은 쥴스가 아닐까요.

   이 순간 제 머릿속에서 절묘하게 교차한 것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상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자리에 함께 있던 빈센트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니까요. 아니, ‘나중에’ 심판을 받게 될 테니까요. 그것을 우리는 ‘이미’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억지로라도’ 한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을 위한 신의 섭리를 읽어낸다면, 또는 그러고 싶다면, 불경(不敬)이 될까요.  *        

  

                        - ‘신의 섭리를 헤아리다’는 여기까지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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