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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14. 2024

11. 참혹한 일을 통한 가르침

  - 켄 로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11. 참혹한 일을 통한 가르침 - 켄 로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인지상정의 무한 질주

   신약성경 네 복음서의 기록들을 참조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로 남기신 말씀은 모두 일곱 마디입니다.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하지요. 이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의 기록이 가장 상세합니다. 그 마지막 일곱 마디 가운데 저한테 가장 감동이 되는 말씀은 23장 34절의 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굉장한 말씀 아닙니까.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해주기 위하여 ‘이집트의 왕자’라는 기득권을 아낌없이 버렸던 천하의 지도자 모세조차도 이런 용서의 중보기도는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술 더 떠 모세는,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불평을 멈출 줄 모르는 동족을 가차 없이 질책하고 저주했습니다. 하긴, 이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는 ‘사하여 주옵소서’가 아니라 ‘벌하여 주옵소서’로 바뀌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그들이 정신을 차릴 테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천만다행 아닙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사랑과 용서를 역설하셨는데도 지금 이 세상이 개인 간, 세대 간, 계층 간, 정파 간, 당파 간, 분파 간, 젠더 간, 국가 간, 인종 간, 민족 간, 종교 간의 복수와 증오, 그리고 적대행위의 복마전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만일 예수님께서 그때 정말로 ‘아버지, 저를 십자가에 못박은 저것들을 결코 용서하지 마시고, 끝까지 쫓아가 벌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셨다면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이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제 마음을 ‘흔드는’ 것은 바로 이 인지상정의 무한 질주가 인간을 어떻게 파멸시키는가를 끝까지 추적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이야기

   이 영화는 한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1920년대,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던 그 시기의 역사적인 정황을 한 형제의 이야기로 축소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식의 설명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영화는 지금까지 다각도에서 거듭하여 그 문제를 다뤄왔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개최되는 영화제들이 이 문제에 보인 관심도 세상의 관심만큼이나 후했지요.

   일찍이 2006년의 칸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다면, 베니스는 이미 그보다 10년 전인 1996년에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 닐 조던의 〈마이클 콜린스〉를 황금사자상으로 기린 바 있으니까요.     


켄 로치의 테마

   더욱이 우리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는 만큼 감독 켄 로치가 정치적으로 어떤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지도 잘 압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지요. 부랑자, 광산 노동자, 혁명가, 마약 중독자, 외국인 노동자, 무정부주의자 들의 이야기로 빼곡히 채워진 그의 한결같은 필모그래피가 그 근거입니다.

   그러니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아일랜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봉준호의 〈괴물〉(2006)에 괴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합니다. 다른 것을 보아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사랑과 용서라는 주제가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사랑과 용서를 역설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줄기차게 보여주는 것은 연대와 반목의 테마요, 복수에 복수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끔찍한 서사입니다.     


연대와 투쟁

   영화는 하키 시합을 하던 아일랜드 청년들을 영국군이 집시법 위반이라는 명목을 들어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 순간 아일랜드 청년들을 대하는 영국군의 태도는 흡사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은 적군을 대하는 태도를 방불케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일랜드 청년들은 그 상황을 대놓고 ‘전쟁(War)’이라 일컫습니다. 전쟁이란 무조건 이겨놓고 봐야 하는 것이니, 적에 대한 증오는 극심할수록 효과적인 에너지가 됩니다. 거기에 사랑과 용서라는 미덕은 끼어들 틈조차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서로의 공격과 반격은 한쪽이 완전히 괴멸될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복마전의 한가운데 한 형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뜻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기차역에서 아일랜드인에게 가하는 영국군의 무도한 횡포를 목격한 동생 데이미언(킬리언 머피)이 마음을 고쳐먹고 형 테디(페드레익 딜레이니)와 함께 아일랜드 해방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또는 계기로 형제는 마침내 연대합니다.

   이후 형제는 아일랜드 독립군 대원으로 함께 총을 들고 영국군에 맞서 싸웁니다. 영화는 거지반 이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결실과 내분

   그렇다면 형제의 뜻이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실패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리라는 짐작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 대목에서 돌연 방향을 바꾸어 형제간의 비극이라는 진짜 목표지점을 향해 망설임 없이 치달아 갑니다. 그것도 그들의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고대하던 자치권을 획득한 뒤의 일이지요.

   이 지점에서 형은 비록 불완전할지언정 그 평화는 소중한 것이니 어쨌든 지켜야 한다는 쪽에 서고, 동생은 완전한 독립을 획득할 때까지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쪽에 섭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한 치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명백한 내분이었습니다.

   누가 과연 옳은지를 떠나 이 대목에서 오롯해지는 것은 용서와 사랑이 없는 인간 만사는 증오와 반목의 국면을 결단코 면할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이제 형제는 지난날 영국군과 아일랜드 독립군의 관계와 흡사한 적대 관계가 됩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일까?

   하지만 둘은 피를 나눈 형제이기에 그 감정의 농도는 상상 이상으로 진합니다. 그 옛날 ‘최초의 인간’ 아담의 두 아들인 카인과 아벨이 그랬던 것처럼요.

   마지막 순간 형이 동생을 처형하는 참혹한 광경 앞에서 우리가 그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은 2천 년 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 저들은, 아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운 것일까,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치기 때문입니다.

   켄 로치 감독은 가혹하게도 바로 이 지옥 같은 순간까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관객을 가차 없이 몰아붙입니다. 이것은 차라리 거의 꾸짖음입니다. 정신 차리라는 꾸짖음―.

   어쩌면 감독은, 인류 최초의 범죄가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형제 살인이었던 것처럼, 가장 참혹한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도록 하는 것이 신의 섭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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