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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07. 2024

10. 자신을 희생하여 전설이 된 사내

  - 프랜시스 로렌스, 〈나는 전설이다〉

10. 자신을 희생하여 전설이 된 사내 - 프랜시스 로렌스, 〈나는 전설이다〉(2007)

전설의 벤치마킹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전설이 된 사내들의 계보가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지요. 워쇼스키의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네오(키아누 리브스)조차도 최후의 순간에는 별수 없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전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사내들의 정점은 예수님이 차지하고 계시지요.

   곧, 그들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전설이 된 것은 바로 이 정점을 벤치마킹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벤치마킹이 자의(自意)로 이루어진 것이냐, 타의(他意)로 이루어진 것이냐의 여부는 따지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희생, 바로 그것이니까요.

   (그래도 왜 하필 사내들이어야만 할까, 하는 의문은 속절없이 남습니다만…….)     


전설의 자격요건

   그러니, 이 영화의 제목 ‘나는 전설이다’는 얼마나 도저한 명제입니까.

   모름지기, 이렇게나 당당히 스스로를 전설로 규정하고 선포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예수님에 준하는 정도의 희생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전설’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자격요건이겠지요.

   〈나는 전설이다〉는 바로 이 희생과 구원의 스토리로 제목의 도저함을 인정받으려 발버둥치는 영화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관객이 이 도저함을 그저 당돌함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고 만다면 영화는 실패작이 될 것이고, 관객이 이 도저함에 압도당하고 설득되면 영화는 성공작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 영화는 바로 이 양자 사이의 판별을 관객에게 종용(慫慂)한다고까지 할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제법 강한 느낌으로 청(請)하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나는 전설이다〉는 리처드 매드슨이 지은 동명의 원작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영화로 옮긴 작품입니다.

   기록상으로는 ‘네 번째 영화화’라고 되어 있지만, 제가 본 것은 찰턴 헤스턴이 주연으로 나왔던 보리스 세걸 감독의 〈오메가 맨〉(1971) 뿐입니다.

   물론, 너무 오래되어서 제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예전에 공중파 방송의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토요명화’ 가운데 어느 시간에 흑백 TV로 보아서 더 그랬는지, 그저 가슴이 답답할 만큼 암담했던 기억만은 여태까지도 짙게 남아 있습니다.

   더불어, 그 건장한 체격의 ‘벤허’ 찰턴 헤스턴이 그토록 애처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던 기억도 뇌리에 인상적으로 새겨져 있지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문제의 원작 소설은, 제가 읽고 받았던 느낌으로는, 영화보다 훨씬 더 암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프랜시스 로렌스는 〈매트릭스〉의 ‘네오’ 키아누 리브스가 ‘엑소시스트’로 나왔던 〈콘스탄틴〉(2005)의 감독 아닙니까.

   게다가 원작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영화의 제목으로 삼은 이 당돌함이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원작 소설의 변형이라는 문제

   문제는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의 〈나는 전설이다〉를 보았을 때 저한테는 원작 소설을 변형하는 문제, 특히 결말을 바꾸는 문제가 새삼 흥미롭게 다가왔다는 점입니다.

   잭 피니의 소설 《바디 스내처》를 네 번째로 영화화한 올리버 히르비겔의 〈인베이전〉(2007)이라는 사례와 견주어보면, 〈나는 전설이다〉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합니다.

   소설 《바디 스내처》를 영화로 만드는 태도와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영화로 만드는 태도 사이에 드러나 있는 이 미묘한 차이―.

   소설 《바디 스내처》의 결말은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사건과 문제가 마지막 순간 해결된다는 점에서, 예컨대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2005)의 결말과 비슷한 부류로 묶을 수 있겠습니다. 일종의 해피엔딩이지요. 말하자면 독자 또는 관객에게 안도감을 주는 결말이라고 하면 될까요.

   반면에,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암담한 결말로 가차 없이 끝납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지요. 모두가 다 좀비인데, 나 혼자만 좀비가 아닌 인간이라면, 그런 세상에서는 도대체 어느 쪽이 정상이고, 어느 쪽이 비정상인 걸까요?

   이 문제 제기가 엄연한 테마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는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그래서 단순한 대중소설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 제 평가입니다.     


원작을 변형하는 패턴

   어쨌거나, 한쪽은 해피엔딩이고, 다른 한쪽은 언-해피엔딩입니다. 여기서부터가 흥미롭습니다.

   해피엔딩인 《바디 스내처》를 영화화한 네 편의 영화들 가운데 〈인베이전〉을 제외한 나머지, 그러니까 돈 시겔(1956년작 〈신체 강탈자의 침입〉), 필립 카우프만(1978년작 〈우주의 침입자〉), 그리고 아벨 페라라(1993년작 〈바디 에이리언〉)의 영화들은 전부 원작과 결말이 다릅니다. 해피엔딩을 언-해피엔딩으로 바꾼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전설이다〉의 경우에는 결말을 바꿈으로써 영화의 테마가 원작 소설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어졌고, 더불어 해석의 여지도 넓어졌다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꽤나 성공적인 변형인 셈이지요. 해피엔딩이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설정은 다르지만, 원작의 결말을 그대로 따른 〈인베이전〉이 다소 시시껄렁한 영화가 되어버린 것은, 니콜 키드먼의 연기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유감스럽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그 암담한 결말, 소설을 읽는 내내 제발 이 이야기가 행복하고 다행스러운 결말로 끝나면 좋겠다는 독자로서 저의 희망과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 암담한 결말로 그 특유의 도저함을 보전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 소설의 영화화입니다.

   〈오메가 맨〉은 그런대로 원작의 궤적을 충실히 밟은 셈이지만, 〈나는 전설이다〉는 원작의 결말을 바꾸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확실히 바꾸었지요.

   한데, 이 결말이 저는 그렇게 싫은 느낌이 아닙니다. 희망의 편린을 보여주는 이 결말이 상업적인 해피엔딩 추세에 편승한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자체로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이 제 솔직한 소회입니다.


기도하는 인간

   개인적으로 저는 할리우드 영화가 9·11을 전후로 하여 뭔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 혼자만의 주관적인 관찰 결과라서 선뜻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9·11 전에는 할리우드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결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 드러내놓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늘 이상했습니다.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성경책에 손을 얹고 하는 명실상부한 기독교(정확히는 개신교) 국가인 미국 아닙니까.

   그런 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속 인물이 어떤 상황, 그것도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이슬람권에서 만든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알라신을 경배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생각이었으니까요.

   물론 앞서도 밝혔듯이 이는 저만의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상업적인 차원에서 비기독교 국가들에조차 영화를 배급해야 하는 사정 때문이라고 십분 이해하더라도 이상한 느낌인 것만은 어쩔 수 없었지요.

   한데, 9·11 뒤에 만들어진 영화들에서는, 적어도 한동안은, 인물들이 기도하는 장면이 신기하리만큼 심심치 않게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이렇게 트릿한 태도로는 안 되겠다는 깊은 자각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래서 〈나는 전설이다〉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윌 스미스가 아내와 딸을 헬기에 태워서 떠나보낼 때 그 아내가 간절히 기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주님, 저희를 구원하여주소서……”

   그것은 현실의 삶 속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장면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참 이상하고 낯선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그 대목에서 저는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희생과 구원의 테마로 나아가리라는 것을 더는 부정하기 힘들었습니다. 복선이라면 복선이고, 암시라면 암시겠지요.

   동시에 이것은 신의 섭리가 영화 전체의 구조를 떠받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리라는 짐작이기도 하였습니다.     


자기희생의 예정된 결말

   그렇다면 이 영화는, 워쇼스키의 〈매트릭스〉 시리즈가 그랬듯이. 주인공의 자기희생이 인류를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더욱이 애지중지하던 개를 잃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살을 택하려는 윌 스미스를 구해준 여인이 독실한 신앙인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원작 소설과는 다른 ‘예정된’ 결말을 향하여 거침없이 줄달음칩니다.

   마지막 순간 윌 스미스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그 덕에 여인은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아남아 윌 스미스가 건네준 인류 구원의 백신인 혈액 샘플을 가지고 아직 생존해 있는 다른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을 만나지요.

   바로 그 장면, 윌 스미스가 자신을 희생하여 지켜낸 그 혈액 샘플이 여인의 손에서 다른 생존자의 손으로 건네지는 그 마지막 장면이 자아내는 가슴 뭉클함은 바로 윌 스미스의 희생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의 섭리가 완결되는 순간

   따라서 그것은 인간을 심판하고 구원하려는 신의 섭리가 완결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 내내 적어도 겉으로는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절규하듯 주장했던 현실주의자 윌 스미스는 최후의 순간 분명히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이 신의 섭리인가 봅니다.”

   물론 그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단순히 혈액 샘플 하나가 건네졌다고 인류가 확실히 구원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요.

   어쨌거나 그들은 소수지만, 괴물들은 압도적인 다수이며, 신체적으로도 그들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섣불리 단정짓기 힘든 문제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 순간 희망을 느끼고, 그 다행스러움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우리는 아직 괴물이 아니니, 어쨌거나 괴물의 편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인간 구원의 섭리

   이 마지막 지점에서 프랜시스 로렌스는 〈콘스탄틴〉의 감독답게 과감히 원작의 결말을 내다 버립니다.

   한데, 〈인베이전〉이 원작의 결말을 충실히 따른 덕에 시시껄렁해진 경우와는 다르게, 원작을 배반한 이 변형이 저는 제법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원작의 출구 없는 암담함이 그만큼 싫었던 탓일까요. 그 암담함의 끝에 희망의 편린을 놓아둔 감독의 배려가 저는 고마웠습니다.

   요즘 영화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보기 드문 설정이지요. 그러니 그 주인공 윌 스미스의 장렬한 최후가 허무한 결말로 이어졌다면 거기에서 오는 상실감이 상당히 깊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듯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하는 신의 섭리라는 원리가 윌 스미스가 보여주는 발군의 연기력과 함께 이 영화 전체를 떠받쳐 주는 두 개의 커다란 기둥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항상 구원의 대가로 희생을 요구하는 신의 섭리―.

   그는 결국 전설이 됩니다. 신이 그를 전설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신의 섭리에 순종함으로써 전설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전설’은 원작 소설의 ‘전설’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이 ‘전설’은 기리는 사람들이 있는 전설이고, 원작 소설의 ‘전설’은 기리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전설, 그저 암담하기만 한 전설이니까요.

   윌 스미스는 ‘사람들에게’ 기려지고, 오메가 맨은 ‘괴물들에게’ 기록될 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다름’입니다. 신의 섭리가 개입함으로써 빚어진 ‘다름’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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