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01
CA1. 파블로 베르헤르, 〈로봇 드림〉(2024)
이별을 받아들이는 성숙함. 〈캐스트 어웨이〉(2000, 로버트 저메키스)에 나오는 두 가지 이별. 그 이별의 상대 하나는 윌슨, 또 하나는 아내. 이별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미숙함, 그리고 이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성숙함. 그 어간. 하지만, 이 성숙함은 또 다른 만남이 전제되어 있거나, 또 다른 만남이 그 뒤를 잇는 바탕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다. 그래서 아직 또 다른 만남이 생기기 전에 이별을 받아들이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조금 더 어른스러운 느낌이기는 하다. 그래도 내게는 이 로봇의 이별이 조금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어른스러운 이별과 아름다운 이별의 사이.
CA2. 김세휘, 〈그녀가 죽었다〉(2024)
죽은 것은 그녀도 아니고, 그도 아니다. 그저 인간다움이 죽었을 뿐. 아니면, 죽어가고 있을 뿐. 우리는 그걸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사태요 결말이다. 그나마 기댈 곳이 직업 정신 하나라는 것은 이 얼마나 초라한 인간의 초상인가. 30년 전, 〈사선에서〉(1993, 볼프강 페터센)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범인인 존 말코비치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밀 때 왜 이러느냐는 상대의 물음에 “이게 내 직업이야!”라고 답했던 정황과, 사건이 종결된 뒤 느닷없이 나타나 감사를 표하는 변요한한테 이엘이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하며 표표히 돌아서던 정황이 겹쳐 보이는 것은 속절없는 노릇이다.
CA3. 조선호, 〈하루〉(2017)
택시운전사, 살아남기로 결심하다―. 내가 사는 것이 남이 사는 것이요, 남을 살리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전자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서로 나누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므로. 우리는 결국 하나다. 그를 죽이지 않고 살리려는 것은 그것이 모두가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인 탓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결말은 매우 생태학스럽다.
CA4. 데이비드 레이치, 〈스턴트맨〉(2024)
스턴트맨은 그 자체로 ‘인간 CG’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배우를 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스턴트맨을 보고 있는 것이니까. 스턴트맨은 배우의 허상이자, 그 자체로 또 다른 실상이다. 허상과 실상이 공존하는 존재, 또는 이미지. 어쩌면 스턴트맨이야말로 ‘꿈’이라는 영화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구현체인지도 모른다.
CA5. 조지 밀러, 〈퓨리오사 : 매드 맥스 사가〉(2024)
복수의 감정, 또는 욕망을 유발하는 데는 짧은 시간으로 충분하지만, 복수를 시도하여 완수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 긴 시간은 복수 자체가 요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복수의 욕망을 만들어 낸 사건의 당사자가 그 사건을 저지르기 위해서 준비한 시간에 고스란히 대응되는 시간이다. 따라서 실은 결코 긴 것이 아니다. 딱 알맞은 시간이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복수를 위한 준비의 시간을 견디기란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복수의 완수를 위해서 더 많이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인내심’이다. 이 인내심의 바탕 위에서 복수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은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의 그것과 매우 다른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의 목소리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