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03
CA11. 크리스토퍼 보글리, 〈드림 시나리오〉(2024)
‘이런 영화’를 볼 때 나는 ‘그런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궁금하지가 않다. 또, 그 현상이 장차 사회와 세상에 미칠 영향도 마찬가지로 내 관심의 영역을 벗어나는 문제다. 학문적인, 또는 상업적인 활용 여부는 더더욱. 나는 오직 그 현상 한가운데 놓여 있는, 또는 졸지에 놓여 있게 된 ‘그’의 앞날이 궁금하고 걱정될 뿐이다. 나한테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CA12. 허명행, 〈범죄도시4〉(2024)
내가 꼽는 이 시리즈의 첫째 매력은 이 영화의 주인공 마석도(마동석) 형사가 스티븐 시걸이 실패한 지점과, 대개의 범죄 액션 영화들에서 주인공들이 밟는 관습적인 고생의 길을 둘 다 피했다는 사실이다. 스티븐 시걸이 실패한 지점은 그가 지나치리만큼 도무지 얻어맞지 않는다는 것이고, 여타 범죄 영화들의 주인공이 겪는 관습적인 고생의 길이란 주인공이 상대에게 너무 많이 얻어맞는다는 것이다. 마석도는 이 점에서 중용의 길을 절묘하게 걷는다. 내가 꼽는 이 시리즈의 둘째 매력은 주인공 마석도 형사가 직업 정신에 투철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갈등의 지점에서도 결코 회의하지도, 의심하지도, 고민하지도, 망설이지도, 체념하지도, 변절하지도 않는다. 그럼으로써 윤리적인 차원에서 관객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리얼리티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CA13. 우디 앨런,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20)
티모시 샬라메는 아마도 자신의 진짜 마음, 진심을 잘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그의 죄가 아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알려면 그는 좀 더 나이가 들어야 한다. 또는, 경험이라는 이름의 훈련을 좀 더 받아야 한다. 그가 뉴욕에 갔을 때 마침 비가 내린 것은 천만다행이다. 아마도 비가 내리지 않고 날씨가 내내 화창했다면 그는 자기 진심을 모른 채 뉴욕을 떠났을 것이다. 따라서 우디 앨런이 그를 위하여 뉴욕에 비를 내리게 한 것은 매우 사려 깊은 조치였던 셈이다. 자기 진심을 알고서 뉴욕을 떠난 그에게는, 또는 그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CA14. 길 키넌, 〈고스트버스터즈 : 오싹한 뉴욕〉(2024)
왕년의 주역들이 나이 든 모습으로나마 죄다 출연했는데도 이 영화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것은 시고니 위버가 빠졌기 때문이다. 나한테 시고니 위버는, 그가 〈에일리언〉 시리즈의 전부인 것만큼이나, 〈고스트버스터즈〉 시리즈의 절반이다.
CA15. 토드 헤인즈, 〈메이 디셈버〉(2024)
그들이 ‘메이 디셈버’, 곧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이라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그들은 예전에 커플이었던 적이 없고, 지금 커플이지도 않고, 장차 커플이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별은 그래서 벌어진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것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좁힐 수 없는 성질의 간격이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반복되는 인터뷰는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한 노력이 아니다. 다만 그 간격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운명적인 간격을 확인하고 받아들인 덕에 그들은 삶과 일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