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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l 29. 2024

My Cinema Aphorism_02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02

CA6. 후지이 미치히토, 〈청춘 18X2 너에게로 이어지는 길〉(2024)

   ‘여행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떠나는 여행은 이미 여행이 아닌지도 모른다. 여행은 그냥 가는 것이다. 꼭 변화나 성장, 또는 힐링이 여행의 목적일 필요는 없다. 이 영화에서 지미(허광한)가 떠난 서른여섯 살의 여행은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스〉(2024)에서 해성(유태오)이 떠난 서른여섯 살의 여행이 그랬던 것처럼 결국 이별을 확인하는 마지막 절차였다. 물론 그 이별의 성격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이별이라는 사실 자체가 의미로울 뿐이다. 왜냐하면, 서른여섯 살까지 멈추어 있던 진짜 삶이 그 이별의 뒤에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해성이 그랬듯이, 지미도 마침내 새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삶을 응원하고 싶다.     


CA7. 후지이 미치히토, 〈남은 인생 10년〉(2023)

   이런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 꼭 불행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하는 턱없는 의문이 든다. 몰라서, 또는 알 수 없어서 그렇지, 사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셈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수명(壽命)’, ‘운명(運命)’, ‘숙명(宿命)’, 또는 ‘천수(天壽)’라는 일련의 단어들이 왜 있겠는가. 아마도 그랬기에 타가바야츠 마츠리(코마츠 나나)는 기어코, 한사코, 기어이, 마침내 자신만의 ‘글’을 써낼 수 있지 않았을까. 자기 생명의 연한(年限)을 알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알았을 때 자기 삶이 그 전과는 달라진다는 것은 아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터이다. 어떤 쪽으로 달라지느냐, 또는 달라지게 하느냐의 '다름'만 있을 뿐. 그래서 나는 마츠리의 선택과 집중이 참 갸륵하다.     


CA8. 웨스 볼, 〈혹성 탈출 : 새로운 시대〉(2024)

   상대 세력을 더는 무시할 수도, 부정할 수도, 압도할 수도 없다면 남은 것은 공존의 길뿐일 터이다.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각기 공존하기로 작정하고 서로 합의했다고 할지라도 공존은 매우 위태로운 타협이다. 사람이든 원숭이든, 지적 존재는 합리적으로만 사고하고 움직이지는 않으며, 무엇보다도 안정이라는 기준에서 결코 신뢰하기 힘든 ‘욕망’과 ‘충동’에 휘둘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존은 그저 반길 수만은 없는 사태다. 문제는 그런데도 공존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수(手)’라는 점이다. 그들은 지금 바로 그 수 앞에서 다음 수를 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데, 이 수조차도 독단으로 놓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두 세력이 서로 동의하고 합의해야만 한다. 딜레마다.     


CA9.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차이콥스키의 아내〉(2022)

   차이콥스키가 아니라 그의 아내에게 신경증적으로 집중함으로써, 또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거의 철저하게 외면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이 영화는, 양쪽에 공평히 집중하면서도 음악을 외면하지 않았던 브래들리 쿠퍼의 〈마에스트로 번스타인〉(2023)과 다른 길을 간다. 그 결과 번스타인의 아내는 충분히 그려지지 않았고,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지나치게 그려졌다.     


CA10. 루카 구아다니노, 〈챌린저스〉(2024)

   젠데이아를 나는 〈듄〉과 〈듄:파트2〉에서 발견한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발견의 영화는 〈챌린저스〉였다. 이 영화에 대한 다른 언급은 죄다 군더더기다. 적어도 나로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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