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04
CA16. 요르고스 란티모스, 〈가여운 것들〉(2024)
아마도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도 ‘가여운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생명을 ‘가여운 것들’로 인식했을까? 그렇다면 그 인식은 유대감이나 연대감이나 동질감이었을까? 엠마 스톤이 이 영화의 전부인 것은, 시고니 위버가 〈에일리언〉(1979, 리들리 스코트) 시리즈의 전부인 것, 홀리 헌터가 〈피아노〉(1993, 제인 켐피온)의 전부인 것, 메릴 스트립이 〈소피의 선택〉(1982, 알란 J. 파큘라)의 전부인 것, 케시 베이츠가 〈미저리〉(1990, 로브 라이너)의 전부인 것, 밀라 요보비치가 〈레지던트 이블〉(2002, 폴 W. S. 앤더슨) 시리즈의 전부인 것, 줄리 앤드류스가 〈사운드 오브 뮤직〉(1965, 로버트 와이즈)의 전부인 것, 오드리 헵번이 〈로마의 휴일〉(1953, 윌리엄 와일러)의 전부인 것, 잉그리드 버그만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 샘 우드)의 전부인 것, 비비언 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빅터 플레밍)의 전부인 것과 동일한 사태다. 적어도 나한테는.
CA17. 장재현, 〈파묘〉(2024)
‘묘(墓)’는 핵심이 아니다. 그러니 ‘파묘(破墓)’라는 퍼포먼스가 핵심일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파묘 따위로 ‘한(恨)’이 풀릴, 또는 해결될 턱이 없으니까. ‘한’이라는 것은 애초 생겨 먹기를 풀리거나 해결될 수 없기에 ‘한(또는 원한)’인 것이다. 그러니까 ‘한’은 푸는 것이 아니라, ‘기운(에너지)’으로 변화시켜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파묘가 지향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이다. 바다 저 건너에서는 여기서 파묘를 하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을 것이다.
CA18. 드니 빌뇌브, 〈듄 : 파트2〉(2024)
트릴로지(3부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2편이다. 미학적으로도 그렇지만, 실용적으로도 그렇다. 1편에서 3편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2편의 진짜 구실인 탓이다. 징검다리가 부실하면 1편과 3편 사이에 놓인 강물을 건널 수 없다. 젠데이아가 이 구실을 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CA19. 알렉산더 페인, 〈바튼 아카데미〉(2023)
물론 나한테 알렉산더 페인은 〈어바웃 슈미트〉(2003)의 감독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코미디로 분류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가 어려웠다. 그 추운 크리스마스 시즌에 텅 빈 학교에 남게 된 그들 셋이 서로 나누는 것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 먹이는 사람―. 그들의 공통점은 딱 하나 모두가 ‘먹는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먹기 때문에 그들은 차츰 서로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어 간다. 이것이 기적이다. 〈바튼 아카데미〉는 바로 이 기적을 향해서 달려가는 영화다.
CA20. 쥐스틴 트리에, 〈추락의 해부〉(2023)
추락은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는 것이다. 심리학이 아니라 수학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여기에 심리학의 접근법으로 다가간 탓에 모호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 영화가 심리학에 집중하는 것은 관객이 수학의 영역으로 이야기를 끌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러닝 타임을 다 소비할 때까지 관객은 반드시 심리학의 모호함 속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수학의 영역에서 추락의 정체를 계산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 영화의 트릭은 무너지고 만다. 감독이 속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가장 기피하는 것은 흥행 참패가 아니라, 서사적 실패일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