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05
CA21. 조나단 글래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이청준 선생의 단편소설 〈가위 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 이래 이토록 강렬한 음화(陰畫) 체험은 처음이다. 이것은 시각적이자 정서적이고, 정서적이자 촉각적인 체험이다. 그래서 심장에도 살갗에도 동시에 소름이 돋는다. 음화(陰畫), 음향(音響), 음악(音樂)―. 이 ‘3음’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영화. 말없이 평온한 일상이 펼쳐지는 공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 또는 ‘소음(騷音)’ 들이 이토록 시사적(示唆的)이면서도 동시에 공포스러울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에서 배음(背音)으로 들려오는 생활 소음의, 때로는 멜랑콜리에 가까우리만큼 슬픔과 행복감이 한데 뒤섞인 저 아련한 회고나 회상의 느낌과는 너무도 다른 물성(物性)의 소리들. 이 소리들이 관객에게 종용하는 것은 놀랍게도 상상력이다. 관객이 압도적인 시각 체험을 하는 와중에, 그 소리들이 표현하고 있는, 또는 감추고 있는, 또는 암시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관객 스스로 끊임없이 상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전례 없는 새로운 시도, 또는 실험을 해낸 셈이다.
CA22. 김태용, 〈원더랜드〉(2024)
‘원더’라는 말이 지닌 역설의 느낌은 처음부터 너무도 암시적이면서 동시에 노골적이다. 아마도 제목을 보고 이 영화의 ‘어떠함’에 대하여 오해한 관객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랜드’라는 말이 붙은 곳(놀이동산)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또는 거기가 어쨌거나 일시적인 체류만을 허용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누가 모를 것인가. 그곳은 ‘잠시 머물다가 돌아와야 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원더랜드’도, 어쨌거나, 이 ‘일시적’이라는 운명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세계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대한 뭇사람들의 가입과 탈퇴, 또는 계약과 해지는 이 한계를 자각한 사람들끼리의 아주 자연스러운 거래일 뿐이다. 어느 만큼은 기만이고, 어느 만큼은 체념 섞인 항복(降服)의 거래. 한마디로 시장(市場)의 거래―. 그들은 위로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CA23. 조셉 코신스키, 〈탑건 : 매버릭〉(2022)
내 생각에,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특유의 저 다이내믹하리만큼 ‘싱그러운’ 비행을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영화는 〈스타워즈〉 시리즈가 아니라, 〈탑건〉 시리즈다. 아마 〈탑건 : 매버릭〉이 이 계열로는 현재까지의 극한치가 아닌지. 시각 체험이 정서 체험을 견인하는 매우 드문 사례.
CA24. 박찬욱, 〈헤어질 결심〉(2022)
결심만으로 헤어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결심이 헤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짐이 결심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헤어지는 사람들은 헤어질 결심을 하기 전에 이미 ‘정서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헤어져 있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 헤어질 수 없다. 내 생각에 탕웨이의 마지막 선택은 그가 이 엄중한 이치를 영화 속 그 누구보다도 빨리,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러니까 조승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한 채로 탕웨이의 선택과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헤어질 결심’은 아직 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헤어지겠노라는 결심을 한 순간 그들은 아직 헤어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CA25. 한재림, 〈비상선언〉(2022)
빌런인 임시완이 러닝 타임을 넉넉히 소비하지 않은 지점에서 느닷없이 죽는 것은 일찍이 알프레드 히치콕이 〈싸이코〉(1960)에서 베라 마일스를 통하여 보여준 바 있는 설정이어서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어도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을 판타지처럼, 또는 일장춘몽처럼 처리한 것은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관객한테 필요한 것은 당황이 아니라 충격이라는 사실을 감독이 잠시 잊은 것일까? 하지만 동시에 충격이 아니라 당황을 선택한 감독의 용기와 발상이 귀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