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07
CA31. 오드리 디완, 〈레벤느망〉(2021)
우리는 곧잘 우리보다는 미국이, 미국보다는 유럽이, 유럽에서도 프랑스가 가장 개방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프랑스는, 이미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기독교 문화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했던 사회였고, 미국은 개신교 문화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해 온 나라다. 따라서 우리는 《제2의 성》이 어째서 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프랑스 여성의 손으로 쓰였는지를 찬찬히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그것은 프랑스가 그만큼 문화적으로 앞선 사회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그만큼 강력한 억압 기제가 작동하던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온 작품들을 통하여 바로 그 억압 기제를 얼마나 상세하고 줄기차게 그려왔는지를 고려해 보면, 이는 도저히 부정하기 힘든 사정이 아닐까. 이 영화는 그의 원작 소설(또는 에세이, 또는 일기)인 《사건》을 매우 정밀하고 촘촘하게 반영했다는 것이 내 느낌이요 평가다.
CA32. 대니 스트롱, 〈호밀밭의 반항아〉(2017)
승려는 그(J. D. 샐린저)에게 묻는다. “당신은 평화롭습니까?” 거듭 묻는다. “평화롭습니까?” 그렇다. 행복하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기쁘거나 즐겁냐고 묻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행복이나 기쁨이나 즐거움은 모두 오래가는 정서 상태가 아니니까. 그는 마침내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그는 결코 그만큼 평화롭지 않았다. 그의 내면과 외부가 다 그랬다. 뭔가가 망가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망가진 상태를 문학이라는 방법으로 처리하거나 소화하거나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또는 못했다. 아니면, 그러기를 거부했다. 또는, 그게 싫었다. 그래도 나 같으면 자신을 속이고 학교 신문이 아니라, 지방지에 인터뷰 기사를 팔아넘긴 그 어린 여고생에게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나는 그가 아니고, 그는 내가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91세까지, 어쩌면 충분히, 자기 스타일대로 살았다. 그럼 된 것이다.
CA33. 크리스토퍼 놀란, 〈오펜하이머〉(2023)
과학의 연구 성과가 정치와 연결되는 순간, 아니 과학의 연구 성과를 내려는 과학자가 정치와 결탁하는 순간 그 성과는 어떻게, 또 어디에 쓰이게 되는가. 이 영화는 바로 이 ‘어떻게’와 ‘어디에’라는 문제를 ‘인간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가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더욱 큰 문제는 이 결과에 책임질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점이다. 한데, 인간은 늘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다. 책임질 수 있는 일만 하면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여기서 꼭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또 다른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CA34. 켈시 만, 〈인사이드 아웃2〉(2024)
감정 조절 실패가 한 인간의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파멸을 초래한다면, 그 실패는 감정 주체의 몫일까, 감정 자체의 몫일까. 우리 몸이, 또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우리 몸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듯이, 우리의 감정도 우리의 감정을 다독이고 북돋우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감정은 주체일까 객체일까. 내가 아니라면, 나의 무엇이 그 감정을 다스리는 것일까. 그 소녀를 살리려는 감정 또는 감정들의 선의지(善意志)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리고 마지막 의문. 감정은 DNA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CA35.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영화의 제목을 어째서 ‘콘크리트 디스토피아’라고 짓지 않았을까. ‘유토피아’ 자체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진대? 살 만한 세상은 아니지만, 함께 어우러져서 살 만한 사람들이 적기는 해도 반드시 있기는 하다는 것만이 단 하나의 희망인 세상―. 이건 판타지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