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08
CA36. 브뤼노 시슈, 〈마에스트로〉(2022)
결국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의 화해가 음악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단 하나의 희망이면서 동시에 나머지 전부의 절망이 아닐까. 1대 99의 희망과 절망. 지휘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지만, 지휘 자체는 음악이 아니다. 아마 그 부자(父子)는 마지막 순간에야 이 진리를 가까스로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례 없는 돌발 행동, 곧 지휘대라는 포디움에 둘이 함께 올라가서 ‘싱크로나이즈’ 지휘를 하는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를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마지막 해결책이기에. 그렇게라도 함께, 동시에 음악을 만들어 내어야 했기에.
CA37. 김성수, 〈서울의 봄〉(2023)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리얼리티와 과장(또는 축소) 사이의 어딘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면, 그 운명의 정체를 드러내기에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이런 실화 바탕의 이야기가 아닌지.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역사 속의 어떤 사건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영화 자체에 관한 영화다. 따라서 관객으로서 우리는 불필요한 감정의 격동을 체험할 이유가 없다.
CA38. 자파르 파나히, 〈노 베어스〉(2022)
거기에 진짜로 없는 것은 곰이 아니다. 곰은 처음부터 없었다.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곰은 알레고리다.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을 자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원흉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감독의 진짜 ‘육성’으로 들려준다. 아니, 보여준다. 감독의 목소리를 허공에서 속절없이 사라지는 한갓 파동이 아니라, 손끝 촉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뚜렷한 덩어리 진 물질로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적이다.
CA39. 켄 로치, 〈나의 올드 오크〉(2023)
영국 영화가 광부들의 삶을 계속, 거듭, 끈질기게 호명한다는 것은 결국 잊지 말라는 경고다. 이걸 잊는 순간 영국의 어떤 정신이 무너진다고 보는 것이다. 영국의 광부들과 그 가족이 그들 삶의 터전으로 느닷없이 밀고 들어온 시리아의 난민들과 졸지에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 어느 쪽도 진심으로 그걸 소망하지 않았건만,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하게 되었고, 마침내 살기로 하였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으므로. 사는 게 목적이라면 섞이지 않을 수 없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약점인 동시에 장점이다. 이 약점을 치고 들어온 쪽과 이 장점을 보유한 쪽의 대결이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서로 잘 어우러져 살아가기를 바랄 뿐. 그들도 우리도.
CA40. 올리버 허머너스, 〈리빙, 어떤 인생〉(2022)
걸작의 리메이크가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은 평범해지고 마는 것은 아마 누구도 피하기 힘든 숙명이 아닐는지. 이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를 프레임 단위로 거의 ‘복붙’ 하듯 리메이크했던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1998)가 뜻밖의 평범함으로 기대에 못 미쳤던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원작인 〈이키루〉(1952)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비교 불가의 거장이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이키루〉의 주인공 시무라 다카시를 대체할 만한 배우가 있을 턱이 없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의 주인공인 빌 나이가 매우 훌륭하고 매력적인 배우라는 데에 나는 하등 이견이 없지만, 시무라 다카시는 누가 뭐라든 ‘넘사벽’이다. 애초 경쟁이 되지 않는다. 한데, 〈이키루〉가 흑백이라서일까. 〈리빙, 어떤 인생〉의 컬러 화면은 이상하리만큼 색채의 매력이 반감되어 있다. 색채라는 면에서 〈이키루〉의 경우보다는 살짝 덜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싸이코〉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 영화 〈리빙, 어떤 인생〉에서 놀이터 그네 장면의 감동이 〈이키루〉의 그것에 견주어 현저히 반감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