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09
CA41. 마이클 사노스키, 〈콰이어트 플레이스 : 첫째날〉(2024)
침묵이 생존의 조건이 되는 세상에서 댕댕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성대 수술을 받아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지 않다면, 짖는 것이 본능인 댕댕이의 생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 않을까. 소리 나는 모든 것은, 아니, 소리를 내는 모든 것은 괴물의 사냥감이니까. 이것이 이 영화가 굳이 고양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아닌지. 소리 또는 소음(騷音)에 대한 사유를 관객에게 강제하는, ‘여전히’ 매우 특별한 영화. 사미라(루피타 뇽오)의 최후가 피치 못 할 희생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점이 귀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밝혀지지 않은 ‘그것들’의 목적. 궁금하지만, 기어코 알고 싶지는 않은.
CA42. 남동협, 〈핸섬가이즈〉(2024)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악의(惡意)가 없고, 다만 악마의 플랜만이 있을 뿐이라는 이 기이한 설정.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악의와 악의, 또는 선의와 악의의 충돌이 없으니, 관객은 감정이입에 드는 심리적인 에너지의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영화를 볼 수 있다. 공포 설정이 거의 전혀 공포스럽지 않은 것은, 적어도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그 탓이다. 그래서 코미디가 공포에 주눅 들지 않고 빛날 수 있었다.
CA43. 김성한, 〈하이재킹〉(2024)
전쟁 체험과 하이재킹 체험,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견디기 힘든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길까. 그 비행기의 승객 대부분은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아마 하정우는 그보다 앞서 있었던 하이재킹의 상황에 대하여 그 자신만의 책임 의식, 또는 부채 의식, 나아가 죄책감을 그러안고 있었나 보다. 그가 감행한 자기희생의 심리적 동기는 아마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여진구의 하이재킹을 꼭 복수의 행위라고 보아야만 할까. 그건 살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그는 살길을 찾아 나선 것일 뿐이다. 그의 동기가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 없는 것임은 처음부터 너무나 자명하니까. 이 통찰은 너무너무 쉬운 일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아주 폭력적인 ‘눈 가리고 아웅 하기’가 필요했던 것일 터이다.
CA44. 이종필, 〈탈주〉(2024)
실패조차 못 하게 하는 곳을 ‘탈주’하여 실패라도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이제훈의 의지는 갸륵하고 눈물겹다. 하지만 이 서사가 개개인의 리얼한 삶의 실상에 대한 사려 깊은 관찰을 배제한, 체제에 대한 ‘여전한’ 이분법적인 평가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 올드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제는’ 속절없는 노릇이다.
CA45. 주오 첸, 〈만천과해(瞞天過海)〉(2023)
제목에서 ‘瞞(만)’자는 ‘속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적을 속여서 그 적이 예상치 못한 뜻밖의 방법으로 그 적을 무찌르는 병법의 한 계책을 의미하는데, 원작 영화인 오리올 파울로의 〈인비저블 게스트〉(2016)에서 그 어머니의 계책이 ‘만천과해’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누군가’의 안목이 감탄스럽다. 아마 이 점을 미리 알아차렸더라면 〈자백〉(2022, 윤종석)이 조금 더 매력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허광한의 활용도가 소지섭보다 높다는 느낌이 드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지. 물론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느낌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