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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42. 무(無)의 문학, 또는 체험의 문학

- 무라카미 하루키, 《TV피플》

by 김정수

B42. 무(無)의 문학, 또는 체험의 문학 / 《TV피플》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집, 홍은주 옮김, 비채

가독성과 해방감, 잠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의 느낌―.

이 세 가지 모두가 저한테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는 구실을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만의 주요한 특징들입니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저는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데도 그의 소설은 출간될 때마다 읽지 않을 수 없고, 손에 잡으면 끝까지 계속 읽게 됩니다.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 작가의 소설을 때마다 높은 가독성으로 읽게 되는 경우는 무라카미 하루키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 소설의 세계 속에 깊이 잠겨 들어서 현실을 잊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과 같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지요.

교훈이나 지적 자극이나 감동이나 공감 따위가 아닌 ‘독서 체험’ 자체로 매력적인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저는 그런 그의 특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소설에는 다른 작가들의 소설에서와는 다르게 ‘뭔가’가 없다고요.

마치 원자를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면 결국은 ‘무(無)’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은 독자를 부담스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이 점, 아주 쿨합니다.

달리 말하면, 해석의 부담에서 독자를 자유롭게 만들어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현대 미술이나 현대 음악이 관람객이나 청중에게 해석의 부담을 떨쳐버리고, 볼 때의 감각, 들을 때의 감각 그 자체에 자유롭게 자신을 내맡기는, ‘편안한’ 감상을 유도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해석에 대한 부담에서 독자를 자유롭게 해 준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이요 느낌입니다.

예, 그의 소설은 해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에는 애써 해석할 필요가 있는 그 무엇인가가 없으니까요.

없기에 그의 소설은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읽어도 결코 질리지 않는 이상한 가독성으로 저를 사로잡습니다.

가독성 높게 읽는 체험,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이 책은 바로 그 ‘무(無)’의 원형을 볼 수 있는 작품집인 셈입니다.

1979년에 장편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그의 작품 활동을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눌 수 있다면, 아마도 전기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1989년과 1990년, 두 해 동안 발표한, 장편이 아닌 소설 여섯 편입니다.

판타지, SF, 리얼리즘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 특유의 작풍이 어김없이 관철되어 있는 작품들이지요.

저는 특별히 부부관계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한 〈잠〉이 인상적이었지만, 나머지 다른 작품들도 마치 정세랑의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김없이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다이내믹한 가독성으로 읽혔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들의 배경이 되어 있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던 무렵 특유의 시대감각이 2024년이라는 시점에서 새삼 매우 낯설면서도 동시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저한테는 몹시 매력적으로 다가왔지요.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쿨한 ‘독서 체험’의 문학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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