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개월, 3주... 그리고 2일〉 & 〈카비리아의 밤〉
C29. 카비리아와 오틸리아, 그 한없이 걱정스러운 여인들 – 크리스티안 문주,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 & 페데리코 펠리니, 〈카비리아의 밤〉(1957)
같은 공간, 다른 세계
2007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한 장면입니다.
‘그녀’가 불법 낙태 시술 장소를 구하러 찾아간 호텔 로비에서 프런트의 담당자한테 문의하는 장면이지요.
화면 왼쪽에 그녀가 있고, 오른쪽에 호텔 직원이 있습니다. 매우 정석(定石)스러운 투 쇼트의 화면입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정중앙에, 건너편의 기슭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강물처럼, 혹은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왕복 8차선 고속도로처럼, 위풍당당하게 놓인 압도적인 프런트의 경계 담장―.
이것은 마치 그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지만, 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웅변하는 듯합니다.
이상한 기시감
이때 엄습하는 이상한 기시감(旣視感)―.
이것은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이자, 미국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인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1957년 작 〈카비리아의 밤〉에 나오는 한 장면과 신기하리만큼 똑같습니다.
카메라가 놓인 위치, 앵글, 인물들이 마주 보고 있는 각도, 그들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까지, 모든 것이 똑같지요.
단지 〈카비리아의 밤〉은 흑백영화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색채영화라는 점이 다를 뿐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렇다면 정말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이 페데리코 펠리니를, 또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카비리아의 밤〉을 참조했을까요?
덧붙여, ‘카비리아’와 ‘오틸리아’라는 이름이 갖는 라임의 이 기막힌 상동성(相同性)까지―.
카비리아가 하지 않은 일, 또는 오틸리아가 한 일
〈카비리아의 밤〉의 그 장면에서 왼쪽에 서 있던 인물은 ‘거리의 여인’ 카비리아(줄리에타 마시나)였고,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그 장면에서는 ‘대학생’ 오틸리아(안나 마리아 마링카)가 서 있습니다.
그 두 여인의 신분이나, 그들이 각기 놓인 처지는 전혀 다르지만, 저는 그 두 여인에게서 이상한 공통점을 느낍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을 진정한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째서요?
카비리아는 ‘거리의 여인’이고, 오틸리아는 ‘대학생’이지만, 그 둘은 결과적으로 그 호텔에서 ‘같은 종류의’ 일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니, 이것도 아주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카비리아의 밤〉에서 카비리아는 거리의 여인이지만, 그 호텔에서 결국 ‘그 일’을 하지 않게 되고,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 오틸리아는 대학생이지만, 그 호텔에서 결국 ‘그 일’을 하게 되니까요.
가혹한 운명의 상동성
여기서 저는 결국 궁지에 몰린 여인들의 ‘그 행위’에 깃들어 있는 유구한 운명적인 족쇄를 읽습니다. 아니, 봅니다. 어쩔 수 없이요.
그래서 한없이 불편하고, 그지없이 비통합니다.
거리의 여인도 대학생도 여성의, 또는 여성이라는 몸을 지닌 존재로서 맞닥뜨린 운명적인 국면에서는 결국 마찬가지라는 이 인식은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잔혹합니다.
물론 〈카비리아의 밤〉의 카비리아는 전후 이탈리아의 피폐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오틸리아는 아직 저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엄혹한 루마니아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피폐함’과 ‘엄혹함’의 차이―.
따라서 두 여인을 같은 범주로 묶는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만큼은 억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저는 속절없이 두 여인이 공통으로 얽매인 그 가혹한 운명의 굴레, 그리고 그 굴레가 갖는 소름 끼치는 상동성(相同性)을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이 두 영화는 그 정서적인 느낌이 서로 많이 다르면서도 동시에 서로 너무나 비슷합니다. 적어도 저는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결말은 더욱 그렇습니다.
몹시 걱정되는 그녀들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했던 말을 참고하면, 페데리코 펠리니는 〈카비리아의 밤〉의 줄리에타 마시나가 자신이 만든 모든 영화의 모든 캐릭터 가운데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일하게 걱정이 되는’ 캐릭터라고 고백한 바 있지요.
저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안나 마리아 마링카를 보면서 바로 그와 똑같은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녀는 대학생입니다. 애인도 있습니다. 임신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생활력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서 그녀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똑똑하고 당찬 여인입니다.
늘 얼굴에 드리워 있는 기본적인 그늘이 보는 이의 우려를 자아내기는 해도,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강인함에 대한 역설적인 증거로 새길 수도 있는 요소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녀는 그걸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선택합니다. 그것은 거의 ‘감행(敢行)’입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 잠깐의 모면은 될지언정, 궁극적인 해결책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녀도 그녀의 친구도, 나아가 그 무지막지한 불법 낙태 시술자 사내도, 심지어 그들 모두를 곤혹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관객인 우리조차도 다 잘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저는, 온갖 수모를 겪어가며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낙태에 성공한(!) 친구와 더불어 초라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마지막 장면의 그녀를 보면서, 페데리코 펠리니가 〈카비리아의 밤〉의 줄리에타 마시나를 걱정한 것처럼, 그녀가, 그녀의 친구가, 나아가 그 둘의 장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몹시 걱정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걱정
머빈 르로이 감독의 1940년 작인 〈애수〉에서 그녀 마이라(비비언 리)에 대해서부터 시작된 이 걱정은, 2022년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영화화한 2021년도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레벤느망〉(2021, 오드리 디완)에서의 그녀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에 대한 걱정으로,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글쎄요. 머지않아 일어날 혁명이 그 고약한 운명의 굴레에서 그녀들을 해방시켜 줄까요?
아니, 시점을 따질 때 이것은 과거형으로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그녀들은 과연 해방되었을까요?
저는 그녀들이 해방되었기를 간절히 희망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주 잠깐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제가 도저히 그렇게 믿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저한테 그렇게 섣불리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의 마지막 눈빛 앞에서 여지없이, 속절없이, 다시 한번 한없는 걱정에 휩싸이고 맙니다.
이 영화는 이렇듯 보는 이를 걱정하게 만드는, 아니, 걱정해야 한다고, 그 걱정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