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09. [영화 톺아보기] 그 이름 없는 사제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가? - 로베르 브레송,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1951)
#08. 의사 델방드
이번에도 델방드라는 의사를 소개하는 사제의 독백이 먼저입니다.
‘의사는 성격 괴팍한 노인네로, 환자들을 나 몰라라 한 지 한참 됐다.’
이 독백대로 수염이 텁수룩한 의사 델방드는 한눈에도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인상입니다.
그가 막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아직 씻지도 않은 더러운 손으로 사제를 진찰한 다음 그제야 내뱉는 첫마디는 그에 걸맞게 해괴합니다.
“심심할 때 마실 오시오. 내가 아무한테나 이런 말 하는 줄 아시오? 이미 또르씨 사제한테서 당신 얘기는 들었다오. 눈이 마음에 드는군. 견공의 눈처럼 충직해. 또르씨 사제와 당신과 나는 모두 똑같은 족속이라오. 아주 재미있는 캐릭터들이라고 할 수 있지.”
진찰 결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어쩌면 사제의 병세가 이미 너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처방 따위 필요 없다는 판단을 스스로 내린 탓일까요. 흡사 죽을 날 받아놓은 불치병 환자한테 의사가 이제부터 맛있는 거나 실컷 먹으면서 지내라고 권해주는 투입니다. 의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더는 없다는 뜻이지요.
사제가 되묻습니다. 물론 따지고 드는 투는 아닙니다.
“똑같은 족속이라니요?”
이에 대한 의사의 답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버텨내고 있지 않소. 무엇 때문에 버텨내느냐고? 누가 알겠소. 어렸을 때 나한텐 좌우명 하나가 있었다오. ‘맞서자!’라는 거였지. 무엇에 맞서느냐고? 그건 내가 되묻고 싶은 말이오. 불의에 맞서는 거냐고? 물론 나는 정의라는 말을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지만은 않았다오. 나 스스로한테 그걸 요구한 적도 없고 말이오. 왜냐하면, 나는 신을 믿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누구한테 요구해야 하겠소?”
이어지는 것은 사제의 대답이 아니라 독백입니다.
‘나는 아직 경험이 모자라지만, 영혼의 상처를 드러내는 뉘앙스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다.’
몸을 다루는 의사와 달리 영혼을 다루는 사람답게 사제는 의사의 말에서 의사만의 어떤 ‘영혼의 상처’를 읽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는 역시 의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제의 몸 상태에 대한 언질을 잊지 않으니까요. 이때만큼은 의사의 표정도 다소 심각합니다.
“상태가 썩 좋지는 않소. 제때 끼니도 챙겨 먹지 않고 지내는 건 아니오? 지금으로서는 많이 늦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오.”
마지막은 일종의 선고입니다.
어지간히 짐작은 했어도 사제의 표정에 새삼 어둠이 깃드는 것은 속절없는 노릇입니다.
끝으로 의사가 확인차 묻습니다.
“술은 좀 드시오?”
“술이라니요?”
이에 대한 의사의 답이 또 기이합니다.
“아, 물론 당신이 마신 술을 말하는 게 아니오. 당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마신 술이라고 하면 될까?”
사제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다음은 세라피타입니다. *(다음 글로 잇겠습니다.)